I가 I를 만나 극 I를 낳고
고 3인 큰애가 여름방학을 했을 때 고3 여름방학은 중요하니까 독서실이나 스카라도 가라고 살짝 말해보았다. 아이는 수시, 교과로 갈 거라 이미 다 결정 난 것이나 다름없다고 했다. 1학기 기말시험 치기 전에도 그렇게 말했다. 지금 한다고 뭐가 달라지냐고 하면서 천하태평이었다. 고2 여름부터였나, 아이는 그나마 다니던 학원 2곳을 끊고 인강으로 잘해 보겠다며 집에 들어앉았다. 저녁에 아파트 독서실을 잠깐 다니더니 그마저도 정리했다. 학교 끝나면 바로 집으로 오면서도 힘들다고 했다. 칼퇴하는 것도 아니고 칼하교?
여기까지 읽으면 엄마가 너무 무른 것 아니냐, 아이가 하자는 대로 하면 안 된다고 생각하시는 분이 있을 것 같다. 나도 그렇게 호락호락 한 사람은 아니다. 친정아버지에게 물려받은 다혈질과 잔소리, 친정어머니께 물려받은 비판적 성향으로 똘똘 뭉친 사람이다. 잔소리도 하고 화도 내고 갖은 수를 썼는데도 쉽지 않더라 말이지. 겉으로는 순해 보이는 아이가 엄마에게는 얼마나 강성인지, 쟤 성질을 건드리면 학교를 안 간다고 난리 치니까 어쩌겠나. 고등학교 졸업은 시켜야 되니 살살 눈치를 살필 수밖에. 그래서 점점 말문을 닫게 되었고 몸에는 그만큼 사리가 쌓이고 있었다.
어쨌든 학기 중에는 학교라도 가지만, 방학 때가 되면 두문불출 집에만 있다. 본인 입으로 말하는 집순이, 집에 있는 게 너무 좋다고 한다. 뭐, 그럴 수도 있지. 그런데 만나는 친구 하나 없고 전화 통화도 하지 않는다. 친구가 귀찮다고 했다. 집에 있어도 얼굴 마주 보며 대화하는 법이 잘 없다. 밥도 방으로 가지고 가서 거지 같은 소굴에서 먹는다. 나도 옛날에 그 나이쯤 부모님과 같이 밥 먹는 것을 싫어했으니 조금 이해는 간다. 너무 집에만 있고 햇빛도 안 쪼이는 아이가 걱정되어 아이가 좋아하는 음식으로 유혹해 보았다. 외식하러 가거나 산책이라도 가자고 하면 단칼에 거절이다.
올해 여름방학에는 아예 집에만 있고 한 번도 밖으로 안 나가는 것이 목표라고 했다. 아니, 집에서 굴 파고 공부만 하는 것도 아니고, 공부는 이제 안 한다면서 왜 집에만 있는 거니. 정말 편의점인지 어딘지 잠깐 나갔다 바로 온 것이 한두 번. 아이는 방학 동안 집에만 있었다. 답답하지도 않나.
중학교 때도 친구가 많고 어울리는 것을 좋아하는 아이는 아이였다. 정말 마음이 잘 통했다는 친구가 먼 동네에 있는 고등학교로 가고 가끔 통화하는 것 같더니 소식이 끊겼다. 그래도 반에서 한두 명 친구는 있어야 되지 않냐는 내 말에 같이 동아리활동 하는 애랑 말한다고 했다. 진짜 두 명 정도 말하는 친구가 있다고 하던데, 누가 먼저 말을 시켜야만 말하고 자신이 먼저 말하지는 않는다고 했다. 이것도 기분이 좋아 보일 때 살짝 꼬셔서 들은 얘기다. 친구들도 알겠지. 자기를 필요로 하지 않고 무관심하다는 것을. 잠깐 같이 버스를 타고 가는 친구가 생겼다고 했는데 금세 떨어져 나갔다. 아이가 외골수로 너무 안으로만 파고들고 자신감도 없고 친구와 함께 어울리는 즐거움을 모르는 것 같아 안타깝다. 어릴 때부터 방학 때면 여행을 데리고 다니며 그렇게 바깥세상을 보여 주고 싶었는데 아이는 왜 친구를 귀찮아하는 걸까. 혹시 누구에게 심한 마음의 상처를 입고 트라우마라도 있나 싶어 기분이 좋아 보일 때 물어봤지만 그런 건 없단다. 있어도 엄마에게 얘기할 것 같진 않다.
남편도 나도 내성적인 I다. 남편은 그래도 술을 마셔서 그런지 친구와 어울리는 것을 좋아한다. 하지만 내성적인 편이다. 나도 말수가 적지만 친구가 적을 뿐 없지는 않다. 어쩌면 친구가 없고 혼자 있는 상태를 두려워하는지도 모르겠다. I 성향의 부모가 극 I를 낳은 것일까. 둘째는 큰애보다는 덜한 것 같지만 비슷하게 집순이다. 친구가 있다고는 하는데 전화를 하거나 따로 만나지는 않는다. 아이들의 베스트 프렌드는 스마트폰. 요즘 애들 다 그렇다, 한창 고민이 많은 시기라 그렇다는 말은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이 동굴 같은 시기를 지나 아이가 마음 맞는 친구를 만나 이야기하면서 청춘의 고민과 걱정을 나누기를 바랄 뿐이다. 집보다 더 넓은 세상으로 나가 꿈을 펼치기를 바라는 것은 엄마의 간절한 소망이다.
아이는 집 근처의 대학을 지망했다. 더 좋은 대학에 붙는다고 해도 가고 싶은 생각이 없다고 한다. 아르바이트도 하지 않고 집에서 편하게 다닐 수 있는 것을 이유로 꼽았다. 아,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지끈하다. 우리 큰 애기를 언제까지 책임져야 할까.
[국어사전] 히키코모리(hikikomori)
정신적인 문제나 사회생활에 대한 스트레스 따위로 인하여 사회적인 교류나 활동을 거부한 채 집 안에만 있는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