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동물을 아주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다. 흰 털이 복슬복슬한 작은 강아지를 보면 귀엽다는 생각은 들었지만 손이 많이 가서 기를 생각은 전혀 없었다. 그런데 어느 날부터인가 고양이가 좋아졌다. 길을 걸을 때 고양이가 보이면 걸음을 멈추고 사진도 찍고 잠시 머물다 갔다.
고양이 입양을 진지하게 생각하게 된 계기는 시골에 사는 남편이 고양이 두 마리를 기르면서부터였다. 한 마리 데려올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삼삼하니 눈에 밟혔다. 남편은 두 마리가 형제로 같이 왔기에 떨어뜨려 놓으면 안 된다고 했다.
원하는 것을 가지지 못하게 되어서일까. 갑자기 고양이가 더 사랑스럽게 다가왔다. 털의 감촉이며 호동그란 눈동자, 살랑거리는 꼬리, 우아한 걸음걸이나 도도한 성격들이 참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아는 집사님은 고양이가 정말 사랑스럽고 고양이를 통해 많은 위안을 얻는다고 했다. 강아지와 달리 고양이는 별로 손이 가지 않으며 깔끔하다고 한다. 털이 많이 빠져서 청소를 자주 해야 하지만, 고양이를 위해 그 정도쯤은 충분히 감수할 수 있다고. 게으른 내가 고양이를 기를 수 있을까? 할 수 있겠지?
지역 아줌마 카페에서 고양이를 검색해 보니 마침 길냥이를 데리고 왔는데 입양하실 분을 구한다는 게시글이 보였다. 고양이를 좋아해서 고양이 카페에도 가는 둘째에게 사진을 보여주면서 물어보았다. 당연히 좋다고 팔짝 뛸 줄 알았는데, 아이는 의외로 싫다고 하는 것이었다.
엄마가 일도 하고 집안일도 해야 하니 고양이를 키우지 말자고 했다. 아이가 엄마를 생각해 주는 것 같아 처음엔 기분이 좋았다. 고양이를 기르면 자기들에게 소홀해질까 봐 질투하는 것 같이 느껴지기도 했다. 그런데 아이가 하는 말을 계속 들어보니 그게 아니었다. 엄마가 늘 힘들다고 하면서 어떻게 고양이까지 잘 기르겠느냐, 고양이를 위해서라도 그렇게 하면 안 된다는 뜻이 숨어 있었다.
아이와 이야기를 하다 보니 슬퍼졌다. 아이에게 너무 부족한 엄마인 나 자신이 부끄러웠다. 일하고 집에 오면 피곤해서 누워 있거나 집안일이 많다고 투덜거리고 짜증을 낼 때는 얼마나 많았던가. 저녁 차려주고 대충 치우고 나면 힘들어서 엄마 좀 내버려 두라고, 중요한 것 아니면 말 시키지 말라고 한 적도 종종 있었다. 밤 12시가 다 되어 안내장이나 뭔가 얘기하러 오면 화가 나는 것이었다. 왜 아까 얘기하지 않았니, 엄마 피곤한데. 지금 그것 꼭 주문해야 되니 등등. 내가 한 말과 행동이 부메랑처럼 가슴에 돌아와 박히는 것이었다.
친정엄마도, 시어른도 다 떨어져 살고 남편은 밖으로만 돌고, 혼자 직장 생활하면서 애 둘 기르기가 얼마나 힘들었던가. 원래도 골골거리는 사람인데 아이를 늦게 낳아서 또래 엄마들보다 나이가 훨씬 많았다. 한창 애 키워야 할 나이에 나의 체력은 밖에서 다 소진되어 버리고 점점 여기저기가 아프고 피곤하고 우울했다. 그렇게 나는 자기 합리화를 하면서 살아왔나 보다. 자세히 성찰해 보면, 스스로의 단점이 뻔히 보이는데 말이다. 친정부모님의 영향을 받았는지 나의 언어습관은 친절하고 다정한 것과 거리가 멀다. 밖에서는 상냥한데 집에 오면 원래의 편한 내 모습으로 돌아왔다. 기분이 좋고 기운이 있으면 집에서도 아이들에게 잘하는데, 그렇지 못할 때가 많았다. 웃음이 사라지며 퉁명스럽고 거칠게 말하는 것이다. 남의 자식에게는 친절하고 정작 소중한 내 아이에게는 불친절한 태도라니 아이러니다.
그동안 나도 나름대로 열심히 일했고, 아이들을 위해서도 다양한 음식을 만들고 베이킹도 하고 여러 가지 살뜰하게 집안일을 하면서 아이들을 챙기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하면 왜 못해준 것, 잘못한 것들만 자꾸 생각이 나는지 모르겠다.
아이의 말을 듣고 자아성찰을 했다. 아이들을 성인으로 기르고 난 후에 고양이 집사가 되든지 말든지 하자고 결론을 내렸다. 고양이를 돌보고 사랑할 에너지로 내 아이들을 아끼고 보살펴야겠다. 아마 고양이도 우리 집에 있는 것보다 밖에서 자유롭게, 또는 나보다 더 따뜻한 집사의 손길을 받는 것이 더 행복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