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 함께 한 두 번의 여행
해외여행을 그렇게 다니면서도 친정어머니를 모시고 간 여행은 두 번뿐이다. 엄마랑 여행도 자주 다니고 맛있는 음식도 사드리면 좋았을 텐데, 나는 늘 내가 먼저였다. 엄마 무릎이 아파서 여행 다니기 힘들다고 멋대로 생각했고, 밖에서 사 먹는 것보다 엄마 밥상이 최고라고 편하게 얻어먹었다. 반찬도 비슷해서 예상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했지만, 늘 그리움으로 다가오는 엄마의 밥상이다. 엄마도 남이 해주는 밥이 맛있었을 텐데, 그렇게 남이 해주는 밥을 같이 먹으러 세 모녀가 떠난 여행의 순간들을 추억해 본다.
엄마는 관절염이 심한데도 패키지 팀에 피해를 안 끼치시려고 늘 앞에서 걸으셨다. 그러다 마지막에는 힘들어서 저녁 안 드시고 호텔에 가면 안 되냐고 하셨다. 그래도 참 잘 걸었던 우리 엄마.
그다음에는 자유여행으로 대만에 갔다. 그런데 사람이 많은 큰 절에서 사진 찍느라 한눈 판 사이 엄마를 잃어버렸다. 보이는 불상마다 고개를 조아려 기도를 하며 절을 한 바퀴 돌다 보니 일행과 멀어져 버린 것이다. 혼비백산한 우리 자매와 다르게 엄마는 볼일 다 보시고 느긋하게 정문에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셨다.
야경을 본답시고 늦게까지 타이베이를 돌아다니며 엄마를 힘들게 했던 것이 지금은 못내 후회스럽다. 그래도 웃다가 오줌 지릴 정도로 즐거웠던 그 시간들이 눈물 나도록 그리워지는 날이 있다.
엄마는 원래 불교 신자는 아니었는데, 어느 날부터인가 가끔 절에 다니곤 하셨다. 우리가 여행한 베트남, 캄보디아, 대만 타이베이에서도 불교 사원을 좋아하셨고 절에서 열심히 기도를 하셨다. 그렇게도 간절히 원했던 친손주를 끝끝내 보시진 못했지만, 기도하는 엄마의 모습은 뭉클했다.
오랜만에 엄마의 사진을 꺼내보니 내 기억과는 다르게 엄마는 늘 웃고 계셨다. 어린아이와 같은 천진한 미소. 스펀에서 풍등을 날리며 엄마가 빌었던 것은 오직 자식의 행복이었을 것이다. 한 아이를 일찍 여의고 네 명의 자식을 키웠으나 누구 하나 걱정 안 끼치고 행복하게 잘 사는 자식이 없었다.
풍등과 함께 엄마의 근심걱정도 잠시나마 모두 저 하늘로 날아갔을 테지.
오늘은 돌아가신 엄마가 우리에게 남겨주신 추억을 떠올리며 조금은 따뜻하게 잠들 수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