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번째 봄
3학년이 되어 2학년 2학기 설계 중간에 진행했던 전시회에 대한 글을 보았다.
아주 단순한 생각에서 시작되었다.
'디자인을 해보고 싶다'
물론 이 생각을 처음부터 한 것도 아니다. 2학년 1학기의 나는 무언가에 매우 두려워했었다. 설계를 할 때도 시도하는 것이 두려워서 제한적인 공간만을 생각했고 어떤 한 요소에 무척이나 치중해 버려서, 최종 크리틱 때는 내가 한 실수들이 너무나도 적나라하게 보였다. 다만 그런 시간이 의미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기에 1학기가 끝나고 나는 나 자신을 다시 한번 되돌아보았다. 그리고 맞이한 방학. 시작은 5학년 선배의 졸업 작품을 돕는 것이었다. 1학년 때 한 번도 해보지 못해서 사실 조금은 두려웠었다. '나는 잘하는 게 없는데, 괜히 피해만 가면 어쩌지' 마주한 것은 새로운 환경과 새로운 사람들. 변화를 싫어하던 나에게는 큰 터닝포인트였고 거창하게 말할 것도 없이 나의 '모든 변화'의 시작이었다.
사실 별 건 없었다. 대지를 만들고, 슬라브를 자르고, 벽을 자르고, 붙이는 단순 작업의 반복이라고도 할 수 있다. 대지를 자른 것을 붙이기만 하면 되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이것을 언제 끝낼까라는 생각에 약간은 막막했지만 하다 보면 분명히 끝이 보일 것이라는 믿음으로 하나하나 쌓아나갔다.
두 번째는 원형 슬라브를 자르는 것이다. ‘원형이라니, 나는 칼질도 잘하지 않는데’ 무얼 하든 간에 자신이 없는 나였다. 그래도 팔에 힘을 주어서 최대한 동그랗게 잘라 벽도 붙였더니 꽤나 괜찮다고 말할 수 있는 결과물이 나왔다. 그렇게 내가 진심을 다해서 도운 사람들과 작품이 졸업 전시에 올라가는 것을 보니 5학년 선배님이 대단했고 나 자신이 약간은 뿌듯하고 자랑스럽기까지 했다. 졸업 전시를 보고 돌아오는 길에 유난히도 파란 하늘을 보며 다시 한번 생각해 봤다.
'아, 이제 시작이구나'
그리고 그날 바로 무언가를 다짐했고 계획을 세웠다. 다 못해도 좋으니, 방학 때는 최대한 여러 가지 툴을 다뤄보자고. 시작은 캐드였다. 아무래도 한계가 있다 보니 더 배우기로 결심해서 매일 종로 3가까지 1호선을 타고 가서 긴 시간 동안 캐드를 다시 배웠다. 비가 와도, 날씨가 놀러 나가기 좋을 만큼 맑아도 말이다. 처음부터 다시 되돌아간 것이다. 라이노도 종종 만져보았고 스케치업도 까먹지 않을 만큼만 연습했다. 그래스호퍼는 개념만 익히면서 거부감을 최소화하는 것을 목적으로 배웠다.
그리고 내가 가장 하기 두려워하는 일러스트레이터와 포토샵을 매일매일 학습하기로 했다. 유튜브에서 아무 강의나 검색해서 매일 다뤄보았다. 그랬더니 거부감이나 약간의 두려움이 사라졌고 오히려 재미가 붙었다. 그리고 깨달은 사실이 있다. 이러한 무수히 많은 툴들은 그저 내 생각을 표현하기 위한 '수단'이구나. 그러니 내 생각을 마음껏 표현하고, 제한을 두지 말자.
2학기가 되어서 솔직히 캐드 표현 방법은 많이 달라지지 않았다. (5학년 2학기에 재학 중인 지금의 내가 보기에는, 많이 달라져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나의 생각 자체는 분명히 변화했다. 가장 부담스러울 것만 같았던 미술관 설계에 과감하게 곡선을 넣었다. 일주일에 이틀, 삼일 밤을 새우고, 분명히 힘들기도 했고 짜증도 났지만 도망칠 마음은 없었다.
2학기 중간마감을 지나 최종 마감이 다가오는 그 시기에 방학 때 디자인 프로젝트를 하기로 한 계획이 추가되어 조금은 앞당겨졌다. 주제는 무언가를 홍보하는 이미지다. 나 자신, 팀, 상품, 모집 공고 등 범위는 다양했으며 참가 제한도 없었다. 설계를 하느라 지칠 만도 하고 다른 것에 신경 쓸 시간이 어디 있겠냐만, 잊지 못할 특별한 경험이자 시작이 될 것 같았다. 무엇을 홍보할까 생각하다가 지금의 나를 있게 한 대학교의 건축학과가 떠올랐다. EA라는 영어 축약어로 be a myself라는 단순한 문장을 만들었고 거기에 EA를 강조했다. 이유는 특별하지 않았고 단숨에 이것으로 결정했다. 불과 1시간 만이었다. 'be a myself'는 나 자신이 되어라 라는 뜻이다. 나 자신과 현재 재학 중인 건축학과를 드러내는 목적이기도 하고, 이런 여러 가지 과정과 의미들이 다양하게 해석될 여지가 충분히 있는 것 같아 마음에 들었다.
변화를 싫어하던 나는 이제 새로운 것을 시도하는 사람이 되었고, 두렵기만 했던 일러스트레이터는 지금 내가 가장 좋아하는 툴이 되었다. 저학년 때는 꿈도 꾸지 못할 책을 쓰고 연재를 하고 있으며, 지금은 졸업 전시를 비롯한 몇 개의 큰 산을 넘었다. 시간이 흘러 새롭게 변화하게 된 그리고 변화할 수 있는 나 자신이 있음에 감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