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01/13
48.
나한전의 나한들처럼 들어찬 글씨들이다. 이전에 나는 그처럼 틈 없이 글씨를 썼다. 그러나 그조차도 판독이 어려워질 적엔 강박적으로 각을 맞춘 글씨를 지었다. 내 일기장은 수차례 버려지고 새로 조립되길 반복했다. 항상 위에는 비스듬히 그 날의 소비내역을 적어두었는데 그 금액이 급격히 줄어드는 때가 있었다. 7년간 교제한 연인이 흘러가듯 떠나가고 난 3년 이래로 씀씀이는 급격하게 줄었다. 연인을 비난하고 싶지 않다. 나는 그 시절 섬망 증상으로 강한 약물을 처방받고 있었다. 14시간을 내리자고도 앉으면 졸기를 반복했으며 깨있는 순간에는 끊임없이 방안을 서성거렸다. 누군가를 만날 상태가 전혀 아니었다. 급격하게 나빠진 내 정신증으로 연인의 얼굴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나날이 늘었다. 체중은 두 달 새에 30 킬로그램 가까이 늘었으며, 침은 바가지로 흘려대었다. 나는 내가 보기에도 역겨운 인간이었다.
그 시절의 나는 하루도 빠짐없이 쓰던 일기를 버려두었다. 단 한 줄도 쓰지 못했을 것이다. 쓰더라도 건강한 문장이 나오진 않았을 것이다. 하루도 빠짐없이 죽음에 대해서 생각했다. 원망에 젖어있거나 울분에 차 있었던 시간들을 건너서 나는 차츰 해독작용을 거쳤다. 체중이 다시 20킬로그램 줄었고, 악몽에 차서 비명 지르던 밤들은 사라졌다. 꿈속에선 진동을 몰고 오는 어떤 존재가 나를 갈갈 찢으려 들었는데, 어느덧 그를 보는 밤이 드물어졌다.
나한들은 저마다의 얼굴로 웃는다. 사람들은 저마다의 글씨를 지니고 있다. 공백을 많이 두는 글씨를 쓰기도 하고, 깨알처럼 움츠려 쓰기도 하는 반면, 강하게 휘갈기는 글씨체도 있다. 나의 옛 연인은 아주 동그랗고 알아보기 쉬운 글씨를 썼다. 내가 떨리는 필치에 세리프를 강조하여 빼곡하게 쓴 것과는 상이했다. 나는 이유 없이 자주 손을 떨었고, 연필을 쥘 때에 강하게 쥐면 글씨를 쓸 수 없었으니 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연인은 심에 가깝게 필기구를 쥐고 각인하듯 또박또박 썼다. 그녀의 글씨는 동그랗게 웃고 있었다. 걸음이 서툴고 해맑은 어린아이들이 열을 맞추어 앉아있는 풍경이 연상되었다. 말갛게 웃는 글씨를 찾기 어려워진 요즘에 그 회상은 퍽 도움이 된다.
울분에 차 있는 번수가 줄기 시작한 것도 그 맘 즈음이었다. 일상적인 것들에 눈을 돌리고, 내게 무엇이 찾아왔었는지에 대해서 살피었다. 진동을 몰고 오는 악몽, 행인처럼 오가는 기억들과 지어낸 기억들 사이서 그냥 서 있다. 그리 고통스럽다는 자각은 없이 그저 언젠가 그 글씨나 나한들처럼 깨끗하게 웃고픈 마음이 들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