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항하다. -5

2026/01/20

by 나무느을보

벽돌담에 다다른 나는 또 다시 번민에 잠긴다. 꾸물거리는 감각이 뱃속에서 솟아나고 있다. 그 이를 만난 것은 몇 해 전이었다. 악마처럼 아름다운 그 이를 어떻게 거부할 수 있었을까. 그는 자신의 아버지의 이름을 팔았다. 유명한 저항시인. 모든 총구와 폭력을 향해서 펜을 돌린 유명한 문학가의 이름을 대며 사진을 보였다. 무척이나 단란해 보였다. 나는 당시에 노마님의 얼굴 따윈 안중에 없었다. 그녀는 내게 그저 평범하고 운이 좋게 위인을 섬긴 한 여자쯤으로 여겼던 것 같다. 하지만 그것은 단단한 착오였다. 노마님이야 말로 그 집의 썩지 않은 대들보였다. 일평생 돈 되지 않는 것들에 발을 빠뜨린 남편을 대신해서 두 아들을 키우고 금전을 보태었다. 남편이 돈을 벌게 된 일은 정말 훗날이었다.


우리는 사랑에 빠졌다. 적어도 나는 그러했고 그 이는 모르겠다. 그 이는 단둘이 있을 적에도 악마 같은 태도를 유지했다. 차갑고 냉랭하다가도, 겨울철 빛줄기와도 같은 것들을 던져주곤 했다. 하지만 그것은 하나의 길들임이었다. 개를 다룰 때에는 단호해야한다는 규칙과 비슷했다. 나는 그렇게 서서히 길들여져 갔다. 그러다가 그 이는 마찬가지로 악마적인 태도로 자리를 떴다. 그리고 다신 돌아오지 않았다. 그가 밉고도 원망스러웠다. 치가 떨렸다. 버려진 충직한 개의 말로는 아름답지 못하다. 나는 빠르게 늙어갔다. 그가 돌아올 법한 장소를 찾아 둘 필요가 있었으며 내겐 시간이 그리 많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수소문 끝에 그이의 아버지를 돌볼 사람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아내었다. 그러나 그 이는 해가 흐르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내놓은 자식인 것이다. 후레자식.


나는 노인의 정신이 흐릿해져가는 장면을 보고도 도망가지 못했다. 어쩌면 내겐 또 다시 길들여질 무엇인가가 필요로 했던 것일 수 있다. 이렇듯 악마가 내 본질을 바꾸어놓았다. 나는 2년 동안은 이 일을 도맡겠다며 호언장담을 놓았다. 미리 정신과 의사인 첫째 아들내외에게 선급여도 받아놓은 바 있다. 꽤나 큰 액수였다. 씀씀이가 크지 않은 터라 내겐 너무 과분하게만 여겨졌다. 그 숫자가 내 목줄이다. 달에 한 번은 들르겠다는 첫째 아들은 고작 오전 중에 머물다가 휙 하니 떠날 뿐이었다. 그 아내는 발걸음조차 않았다. 멀찍이 차 안에서 기다리고 있는 모습을 본 적이 있는데 희고 달떡 같은 여자였다. 보나마나 고생하나 한 적 없을 것이다.


나는 또 다시 같은 과오를 반복하고 있다. 노마님께 했던 것과 같은 방식으로. 그 사실에 이르러 나는 내 스스로 가 누추해졌다. 벽돌담 아래에서 나는 흙먼지를 다시 떨어내며 일어섰다. 시각은 오후 다섯 시가 가까워오고 있다. 날이 흐려질 낌새가 보이고 있다. 곧 부슬비가 떨지도 모른다. 노인이 발광하기 마당을 막아 놓아야 한다. 언젠가 첫째 아들이 집에 왔을 적에 그 사실을 물었더니 그가 답하길.


“오래 전에 개를 키웠죠. 이 집은 아버지 외갓집을 새로 보수한 거예요. 아버지는 외갓집에서 자랐는데, 거기서 아버지께서 개 한 마리를 예뻐하셨다고 들었어요. 비가 오면 쫓아나가서 뒹구는 독특한 녀석이라고 했어요. 어린 아버지는 그 개랑 같이 흙탕에서 뒹굴며 놀았다고 들었어요. 물론 혼도 많이 났겠죠. 물론 저도 아버지한테서 들은 이야기에요.”


라며 말했다. 그러니까 노인은 비를 맞으면 개의 환영을 보는 모양이었다. 기운찬 어린아이가 되어서 흙탕차림이 되는 것이다. 참 우스운 농담도 다 있다.


순간 빗방울이 콧잔등에 떨어서 시선을 위로 올려 뜨자 가로등 아래 누군가가 서 있다. 나를 바라보고 있다. 지난번의 그것이다. 먹구름이 져서 누구인지 알 수 없다. 아니, 사람인지조차 알 수 없다. 그러나 불심자가 아닌 것은 아니다. 순간 가로등불이 점멸하며 켜졌다. 평소보다 한참 이른 시간이었다. 기껏해야 부슬거리며 떨어질 이슬비라고 여겼던 것이 점차 굵은 장대비가 되어가고 있다. 집으로 가야한다. 노인이 게걸스럽게 웃으며 몸을 일으킬 장면이 눈에 선하다.


나는 큰 팽나무와 막은 우물가를 지나 나는 뛰었다. 도깨비바늘이 잔뜩 붙었다. 본래 다니던 길이 아니다. 그것은 네 발로 뛰었다. 자세히 보니 그것은 검은 털가죽을 뒤집어 쓴 짐승 같았다. 다행히도 그것은 마당에 이르러서 멈추어 섰다. 게슴츠레 웃고 있었다. 나는 현관으로 뛰어 들어가 문을 걸어 닫았다. 그러고 나서야 겨우 노인에게 생각이 미쳤다. 온 집이 고요했다.


‘이젠 내가 미쳐가고 있나봐.’


노인은 곧바르게 누워 있었다. 사방이 거무죽죽했다. 빗소리가 추적추적 온 집안에 가득 울리고 노인은 아기처럼 웅크린 잠을 취하고 있었다. 왼손으로 자그마한 무엇인가를 쥐고 있기에 조약돌이겠거니 하고 뺏어보았는데 불단에서 사라진 아미타불의 머리였다. 괴이쩍은 일이었다. 애초에 겁을 집어먹으면서 밥풀로 빚어 얹어놓을 필요가 없었던 거다. 창가를 내다보니 그 짐승은 사라지고 없었다. 애초부터 헛것이었다는 식이었다. 찬물로 얼굴을 좀 씻어야겠다. 그래야 정신이 들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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