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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은 강하다

영화, <파르하 (Farha)>

by 정물루

“To live is the rarest thing in the world. Most people exist, that is all.”

– 오스카 와일드 (Oscar Wilde)


삶을 산다는 건 특별한 일이다. 대부분은 그저 살아 있을 뿐이다.


그저 살아 있기도 힘든 사람들이 있다. 사람 하나가 아닌, 그 종족 전체가. 그저 그 땅에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모든 불평등과 핍박, 무관심을 겪어야 하는 사람들이 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이다.


2023년 10월 7일, 팔레스타인 가자지구를 통치하고 있는 이슬람 세력 하마스(Hamas)의 이스라엘 선제공격으로 시작된 전쟁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전쟁이라고 하기엔 모든 상황이 너무 불균등하다. 세상 모든 우월한 것들을 다 가진 이스라엘과, 그들에게 77년 동안 식민지 처우를 받아온 팔레스타인 사이에 전쟁이라는 단어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다. 가자지구의 전기, 물, 도로까지 이스라엘이 통제하고 있었으니까.


팔레스타인 사람들은 그동안 아무런 자유 없이 살아왔다. 통행, 표현의 자유는 둘째 치고, 돈을 벌거나 전기나 물을 쓰는 것조차 이스라엘의 통제 아래 살아왔다. 이스라엘 군인들은 마음대로 집 안을 뒤지고, 물건을 가져가고, 폭행과 감금도 일삼았다. 21세기에 이런 일들이 실제로 일어나고 있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인간이 뛰어난 점 중 하나가 상상력이라는데, 내 상상력은 실패한 듯하다.


두바이에서 약 10년 동안 광고회사에 다니며 팔레스타인 출신의 레바논이나 요르단 동료들도 만났고, 팔레스타인 출신들이 운영하는 카페, 갤러리, 음식점도 자주 갔다. ‘여권이 없다’는 팔레스타인 출신 친구의 이야기를 처음 들었을 땐, 그게 무슨 말인지 이해조차 안 됐다. 이 세상에 여권이 없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는 걸, 여기 와서 처음 알았다. 그건 곧 나라가 없다는 의미였다. 여행이나 유학뿐 아니라, 교육, 의료, 기본적인 안전조차 보장되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그렇게도 살아갈 수 있다는 게 너무 놀라웠지만, 그 친구 앞에서는 아무렇지 않은 척 그 이야기를 들었다.


한때 이스라엘 지점으로 출장을 갈 뻔했을 때, 여권에 입국 도장을 절대 받지 말고 다른 종이에 따로 받으라는 조언을 들었다. 이스라엘 지점에는 전화도 연결되지 않았고(당시 국제전화가 막혀 있었다), 두바이엔 이스라엘 사람들도 없었다. 그렇게 가까운 나라인데도, 관광객조차 전혀 없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이스라엘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두바이에 거주하고 사업하는 사람들도 많아졌고, 아이들 학교에도 이스라엘 아이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예전엔 전화도 못 하게 막더니, 사우디아라비아도 이스라엘과 수교를 맺기 직전까지 갔다. 그 와중에, 팔레스타인은 다들 잊은 듯했다. 뭔가 좀 찝찝했지만, 그래도 경제적, 군사적으로 강한 이스라엘과 수교하는 게 국익에 좋다는 분위기였고, 아랍에미리트는 유대교 회당도 지었다.


그러다 20개월 전, 하마스가 이스라엘 시민 251명을 납치한 사건이 발생했고, 이스라엘은 자기 방어라는 명목으로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무차별적으로 학살하기 시작했다. 그때 처음 ‘무차별’이라는 말이 이런 걸 묘사하는구나, 실감하게 됐다. 가자지구에 존재하는 모든 팔레스타인 사람을 테러리스트, 하마스 당원으로 간주하는 정당화 속에서, 종족 학살은 오늘, 지금 이 순간에도 계속되고 있다. 2025년 6월 2일 현재, 가자지구에서 사망하거나 부상당한 어린이 수만 50,000명이 넘었다고 유니세프는 밝혔다. 그리고 5월 기준으로, 최소 16,500명의 어린이가 사망했다고, 가자지구 보건부가 보고했다.


1948년, 이스라엘은 소소하게 살고 있던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그들의 땅에서 쫓아냈다. 그 만행은 많은 역사책에서 왜곡되어 전해지곤 했다.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스스로 떠났다고 말이다. 영화, <Farha>는 이 사건을 온몸으로 겪은 소녀의 실제 이야기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요르단 출신 감독, 다린 살람(Darin J. Sallam)은 어머니의 친구에게 이 이야기를 어릴 때 듣고, 언젠가는 꼭 영화로 만들어야겠다고 다짐했다고 한다.



13세 소녀 파르하(Farha)는 평범한 팔레스타인 가정에서 도시로 유학을 꿈꾸며 살던 아이였다. 하지만 갑자기 들이닥친 이스라엘 군의 침공. 아버지는 딸을 보호하기 위해 작은 저장고에 숨기고 문을 잠근 채 떠난다. 문틈 사이로 파르하는 이스라엘 군인이 어떻게 가족을 죽이고, 갓난아기가 굶어 죽고, 마을이 파괴되는지를 듣고, 보고, 온몸으로 느꼈다.


전통과 자연을 따라 살던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삶과, 파르하가 마지막에 저장고 문을 열고 마주한 유령 도시의 모습은 그 전과 너무 달라져서, 그녀가 겪는 충격의 깊이가 배로 느껴졌다. 시리아 쪽으로 걸어가는 파르하의 뒷모습은, 바로 그렇게 팔레스타인 사람들의 ‘이주(Displacement)’가 시작되었음을 보여준다.


파르하라는 사적인 시선을 통해 바라본 팔레스타인의 역사라서 그런지, 더 공감이 갔다. 내 친구, 내 가족의 이야기처럼 느껴졌다. 공적인 사건을 사적으로 느끼게 해주는 것. 그 기억을, 감각을 공유하는 것. 그게 바로 예술이 할 수 있는 일일지도 모르겠다.


팔레스타인의 현실은 어쩌면 우리나라가 겪었던 과거와도 닮아 있다. 나라를 빼앗기고, 언어를 잃고, 이름과 역사를 지워졌던 그 시절. 일본 제국주의 치하에서 살았던 우리랑 많이 닮았다. 한강 작가가 작년 노벨상 시상식에 했던 말이 떠오른다.


세계는 왜 이토록 폭력적이고 고통스러운가?

동시에 세계는 어떻게 이렇게 아름다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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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