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기획자J Mar 29. 2023

MZ세대가 왜 퇴사하는 줄 아세요?

30년 전 우리 아빠 대신이에요.


“MZ들은 권리의식이 강합니다.”

이정식 고용노동부 장관의 말이다.


요즘 매스컴을 달구는 MZ세대의 중심 연령에 속한 나는 내 모습을 떠올려 봤다. 모두가 부러워하는 대졸 공채로 들어간 대기업에서, 대리 진급 문턱인 3년 만에 때려치우고 나올 때의 나는, 대체 왜 그랬을까?


말도 안 되는 업무량과 지시들, 거래처 폭언을 혼자 감내하던 중 버티다 못해 부모님께 울면서 말씀드렸을 때, 유난히 아빠의 표정이 어두워 보이셨다. 영상 통화 너머로 꺽꺽거리며 우는 딸에게서 30년 전 당신의 모습을 보신 듯했다.


“힘들면 아빠처럼 참지 말고 그만둬. “


고작 3년 만에 오열하게 만든 직장 생활을, 지금보다 더 보수적이고 힘들었을 그 당시에, 그것도 주 6일 근무로 몇십 년을 해내신 아빠가 새삼 너무 대단하고 죄송했다.


역설적이게도, 아빠는 다 바쳐 일한 탓에 회사 생활을 그만두셔야 했다. 허리 디스크가 제대로 터졌기 때문이었다.


-


30년 전, 집안의 장남이었던 아빠는 어려운 살림 탓에 혼자만 대학에 진학할 수 있었다. 동생들에 대한 죄의식에 생활비 지원은 꿈도 못 꾼 채 공사장 일, 다방 DJ 등 여러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아우터 한 벌로 학교를 다녔다. 교재 살 돈이 없어 동기 책을 복사하고 다녔던 것은 물론이다. (이건 아빠의 가장 큰 한이라, 나와 동생에게는 학창 시절 내내 다 못 풀 정도로 많은 교재를 사주셨다.)


졸업할 때 즈음, 아빠는 공무원이 너무 하고 싶었다. 1년 정도는 마음 잡고 공부를 하고 싶은데 하루빨리 취업해 집안에 보탬이 되길 바라시는 부모님께 차마 말씀은 못 드리겠고, 그렇게 우물쭈물하고 있었다. 그러는 사이, 혹시 몰라 지원했던 대기업에 덜컥 합격해 버렸다. (지금이야 당연히 대기업이 더 좋은 거 아니냐 하겠지만 부모님 세대 때의 공무원은 지금과는 비교할 수 없는 메리트와 인식이 있었다.)


마음을 먹고 부모님께 ‘대기업에 합격했다. 하지만 공무원 시험 준비를 더 해보고 싶다.‘라고 말씀드리기 위해 드디어 두 분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어머니, 아버지, 저 00 기업 합격했습니다. 그런데...”

“어머, 됐다!”

“잘했다, 장하다, 이제 됐다!”


아빠는 뒷말을 하지 못하셨다. 자식의 속뜻을 알리 없는 부모님의 섣부른 기쁨이 야속했고, 너무 효자라 그 앞에서 공무원의 기역자도 못 꺼내는 자신이 한심해서 눈물과 분노가 치밀었다.


당시 결혼 전제로 만나고 있던 여자친구, 즉 엄마가 소식을 듣고 축하하기 위해 꽃다발을 사들고 집으로 찾아왔는데, 그 모습을 보니 더더욱 말할 수가 없어서 아빠는 울음 섞인 외마디 고함을 지르고 집밖으로 나가버렸다고 한다. 그리고 지금도 가끔은 이날의 선택을 후회한다고 하신다.


“어머니, 무슨 일 있으셨어요? 저이 대기업 합격했다고 하지 않았나요?”

“그려, 00 기업 합격했다는디.. 혹시 너네 둘이 싸운 거 아니냐?”

“아녜요. 통화로 합격 소식 듣고 온 게 전부예요. “

“고놈 성질 하고는...”


그렇게 들어간 회사였다. 집안에 보탬이 되고, 나 때문에 대학을 가지 못한 동생들에게 갚아야 한다는 마음으로. 그리고 머지않아 결혼을 해서 집과 대출이 생겼고, 첫째 딸 내가 태어났다. 그 당시 아빠 나이 고작 서른이었다. 그렇게 몇십 년간 아빠는 주 6일 근무에 야근까지 불사하며 누구보다 열정적으로 회사를 다녔다.


회사는 제조업 분야였는데 그러다 보니 무거운 물건 나를 일이 많았다고 한다. 대부분 일손이 부족해 사무직군이고 뭐고 없었다고. 저연차 때는 저연차라 박스를 날랐고, 연차가 쌓였을 때는 저연차 직원들만 고생하는 게 미안해 여전히 박스를 날랐다.


그렇게 터졌다. 아빠의 허리 디스크가.


수술 후 1년간 집에만 계시며 아무것도 못하실 만큼 심한 디스크였는데, 그럼에도 아빠는 마지막까지 퇴사하지 않기 위해 애쓰셨다. 하지만 방도는 없었다.


아빠가 입사 후 나에게 누누이 하신 말씀은 “힘든 일 도맡아서 하지 마.“ 였다. 책임감으로 가득 찬 신입사원이었던 나에게서, 누구보다 회사를 위해 헌신했던 과거 자신의 모습을 보신 것 같다. 그리고 그 과정이 너무 고통스러운 것을 알기에 나만큼은 웃으면서 즐겁게 회사를 다니는 모습이 보고 싶다고 하셨다.


그래서 퇴사했다.

30년 전 아빠가 못한 퇴사,

내가 대신하는 마음으로.


걱정과 다르게 딱 한 달의 백수 생활 끝에 경력직 이직에 성공했고 연봉도 올랐다. 바뀐 업계가 예상보다 잘 맞아 잦은 외근도 날아다니는 기분이었다. 그러다 보니 성과가 곧잘 났고 공을 인정받아 입사한 지 1년이 되기도 전에 연봉 추가 인상을 얻어냈다.


아빠가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자주 하시는 말씀이 있다.


“힘들면 또 이직해!”


다 큰 딸이 엉엉 우는 모습에 가슴이 찢어질 것 같았는데, 새 회사에서 인정받으며 이제 할 말은 하고 다니는 모습을 보니 너무 기쁘시다고. 100번을 더 이직해도 좋으니 매 순간순간 참지 말고 행복한 회사 생활을 하라고 하신다.


난 안다. 이건 딸에게 하는 말이자, 30년 전 자신에게 하고 싶은 말이다.


그래서 나는, 30년 전 아빠 대신 퇴사했다.


fin.

작가의 이전글 허리 디스크 아빠의 무모한 사랑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