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반응보고 시즌 2로 돌아오겠다. 쓸거리는 먹거리만큼 많으니까.
내가 정답일수는 없지만 ‘비윤리적인 사육과 도축 지양’이라는 방향성은 옳되 비건 만이 답은 아니라는 말을 하고 싶었다. 그리고 더 깊게 많이 생각해 공동체의 합의에 이르렀으면 좋겠다는 소망을 담아 글을 썼다.
지금으로선 우리가 매일 먹는 음식은 ‘고통’이다. 생명의 고통, 지구의 고통, 어느 생산자와 가공업자의 고통이다. 그렇다면 유통업과 소비자에겐 행복일까, 아니 이것도 아니다. 가성비라는 이름으로 그럴 듯하게 포장된 육류, 해산물에는 사람의 건강과 지구환경 파괴라는 기회비용이 숨어있으니 소비자의 행복도 이 고통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너무 복잡한 산업구조에 우리 소비자가 얽혀있다. 우린 생명을 담보로 잡은 가성비의 허울에 갇혀버렸다. 인류 역사가 지속되면서 점차 강화되어 온 식습관은 어느 순간부터 단단히 엉켰다. 소비자가 가성비에 집중하고, 산업은 더 영악하게 굴러가며 이 실타래를 더욱 엉켰다 하지만 실타래를 풀기를 포기하지 말고, 생각하기도 멈추지 말아야 한다. 특히, 단 하나는 꼭 기억해야 한다. 내 식탁 위에 올라온 건 고통 받는 생명이고, 나와 내 가족의 입에 들어가는 건 조금씩 쌓여갈 독약이라는 것. 그래서 이대로는 안 된다는 것.
육식을 포함한 모든 식생활에는 책임감이 따른다. 그게 콩일지라도 말이다. 웃고 있는 포장지, 귀여운 캐릭터, 그럴듯한 ‘건강’이라는 카피로 포장된 제품 뒤에 숨어있는 논리구조를 봐야 한다.
목차의 대부분이 동물의 고통으로 채워진 것은 어느 한 부분에서라도 공감을 얻고 싶었기 때문이다. 완전한 공감은 이미 나와 같은 생각을 하고 있는 이라서 변화를 이끌어낼 필요가 없다. 나와 다른 이가 변화하기 위해서는 공감할 수 있는 작은 것 하나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당신이 글을 읽고 혼란스럽다면 나는 목적을 달성했다. 혼란스러워질 때 변화는 시작한다고 믿기 때문에.
동물의 고통은 완전한 채식을 설득하고자 쓴 이야기는 아니었다. 단지 이대로는 안 된다는 인식의 변화가 필요했을 뿐이다. 나조차도 완전한 비건이 아니기 때문일까? 현실적으로 모두가 비건이 될 수도 없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극단은 극단을 불러오기 마련이고, 극단은 반드시 집단 반발이라는 부작용을 낳는다. 개인의 취향과 다양성도 당연히 존중되어야 한다.
하지만 먹이사슬 최상위 포식자 품위를 갖추려면 우리가 먹는 모든 것의 전과정에 대한 최소한의 고민과 책임은 져야 하지 않을까? 윤리적 생산과 소비는 개인의 취향을 넘어서서, 인간이 아닌 정말 생명에 예의를 갖춘 ‘동물 복지’와 자연의 균형을 지키는 선택이 되어야 한다.
물도 땅도, 기후도 걷잡을 수 없는 방향으로 치닫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지금의 행동을 멈추지 않는 이유는 뭘까? 오늘과 같은 무책임한 생산과 무분별한 소비가 지속된다면 모두가 위험하다.
대규모 공장식 축산이 기후 변화와 환경오염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알고 있는가? 육류를 저렴한 가격에 대량으로 생산하기 위해서 생명권도 경시되고 있지만 자연도 치명적으로 손상되고 있다.
우리는 ‘가성비’의 실체를 파헤치고, 야무지게 따져야 한다. 포장비와 마케팅 비용은 빠져야 하지만, 윤리적으로 생산된 그래서 사람에게도, 동물에게도 나쁘지 않은 것을 선택해야 진짜 가성비다.
정말로 자연과 인간에게 모두 좋은, 지속가능한 생산과 소비는 가능할까? 그렇다고 믿는다. r그리고 이게 바로 우리가 고민의 시작점이다. 나는 자연의 일부로서, 그 섭리에 어긋나지 않는 방식으로 동물과 공존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같은 맥락에서 나는 비건이 완벽한 해결책이 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비건이 식단의 주재료인 콩. 콩 재배의 문제를 다뤄보자. 고기 소비를 줄이면 사료로 들어가는 콩의 양은 줄어들겠지만, 대체된 비건 식단에 들어가는 콩으로 인해 조삼모사의 형국이 된다.
실제로 브라질의 아마존에서는 대규모 콩 재배로 인한 산림 파괴와 사막화가 심각한 수준이다. 비건을 위해 선택한 대체 식품이 오히려 환경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는 건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비건이라는 선택이 절대적으로 윤리적인 것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하든 그에 따른 책임은 존재한다. 이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그리고 되도록 빨리 이점을 고려해야 한다.
결국 소비자의 선택이 변화의 시작이 될 수밖에 없다. 산업은 언제나 소비자를 따라가니까. 지금 당장은 저렴한 가격에 좋은 품질을 원하지만, 만약 소비자들이 윤리적 생산과 동물 복지를 우선으로 선택하기 시작한다면, 산업도 변화할 수밖에 없다.
동물이 식탁에 오르더라도 지금과는 다른 방식으로 자연스럽게, 사료가 아닌 다양한 농작물을 먹고 생명답게 번식을 하고, 어미와 새끼가 제대로 된 교감을 나눌 수 있도록 기다려주고, 이들이 자연 속에서 살 수 있다면, 그래서 판 고기가 제값을 받을 수 있다면 밀집식 비윤리적 사육을 하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소비자도, 지구도 나쁘지 않은 결과물을 식탁 위에 올려놓을 수 있지 않을까? 항생제, 살충제가 없는, 유전자 변형 곡물을 섭취하지 않은 고기를 먹는 대신 값을 조금 더 지불하고 고기를 조금 덜 먹으면 어떨까? 포만감이 느껴질 때까지 포식하지 않는 건 건강에도 이롭지 않은가.
많이 먹고, 수요를 맞추기 위해 무리하게 많이 생산해서 모두에게 해로운 악순환의 고리를 이제는 끊어야 한다. 멈춰 생각하고 최소한의 양심을 가진 소비로 윤리적인 생산을 이끌어내는 선순환의 고리를 지금 만들고 이어가야 한다.
다시 말하지만 정답을 얘기하는 것도, 완전한 채식을 강요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나는 한 명의 완전한 비건보다, 100명의 작은 변화를 이끌어내는 게 더 큰 힘을 발휘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곡물이 되었든, 동물이 되었든 각자가 자신이 소비하는 음식의 출처, 그 뒤에 있는 생명을 한 번쯤 떠올려 보자. 그 앞에 놓인 미래도 보기 위해 노력하자.
우리가 매일같이 접하는 음식 하나하나가 결국 다른 생명, 누군가의 희생 위에 놓여있다는 걸 기억해야 한다. 그 생명에게 미안하고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며, 조금 덜 소비하고, 조금 더 신중하게 선택해야 한다.
사람, 동물, 어른, 아이, 국적과 성별 등 예외는 없다. 모든 생명은 존중받아야 한다. 윤리적 소비와 생산을 위한 변화는 나 혼자서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소비자는 힘이 있다. 그 힘을 바탕으로 우리는 산업을 올바른 방향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 결국 개개인의 선택이 모든 것을 바꾼다.
판도라의 상자, 마지막에 숨겨진 희망은 어쩌면 ‘시작’이라는 열쇠가 아닐까? 이제부터 변화의 시작이다. 지금, 바로 여기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