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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천유 Mar 07. 2023

자발적 마감노동자의 하루

당 의존적인, 하릴없지만 다소 긴박한 24시간 추적기

연초, 공모전 일정을 정리한다. 굵직한 글쓰기 공모전이 앞으로 일년의 뼈대가 된다.


아침에 일어난다. 7시 혹은 8시.  


간단한 아침을 먹고 호다닥 나간다. 수십년을 겪은 나 자신을 알기 때문이다. 집에서 글을 쓸 수 있는 의지와 인내력, 지구력이 내게는 없다. 투명하고, 분명하고, 정직하게 나는 끝없이 자고 먹을 것이다. 순식간에 하루는 지나갈 것이다. 그렇게 사는게 나쁘다고 볼 순 없지만, 남은 생은 조금 다르게 살기로 마음 먹었다.


한시간을 걸어 일터로 간다.


그날의 일터는 내가 정한다. 활동량이 부족한 내게 운동을 할 이유를 찾아주기 위함이다. 왕복으로 걸으면 교통비가 들어가지 않으니 매일 마시는 커피값이 나온다. 운동도 하고, 커피도 부담없이 매일 마시고, '글을 쓰지 않아도 좋아, 나가서 걷기만 해도 넌 오늘 운동이란 건설적인 행위를 한거야'라고 나를 속일수 있다.


걷는데 음악은 필수다.


특히 팝은 가슴을 늘 두근거리게 한다. 걷는 길은 대부분 인적이 드문 곳이라 눈치보지 않고 노래도 부르고, 리듬도 맞출 수 있다. 물론 출근길 신호대기를 받는 차량이 많지만, 내눈에는 그들의 얼굴이 보이지 않으니 나는 창피하지 않다.


나를 봤다는 제보가 적지 않다. 심지어 태워줄까, 전화하려다 너무 즐거워 보여 말았다고 입을 모은다. 제보를 접할땐 잠시 1초 정도 반사적으로 당황한다. 아무도 못본줄 알았는데ᆢ알만큼은 다들 아는거 같다. 좁은 동네다. 하지만 역시 이 또한 내가 알바 아니다. 나는 선량한 사회의 미풍양속을 지키고 사는 평범한 이웃이니.


나는 줄이어폰을 쓴다. 덤벙거리는 나는 무선이어폰을 주머니에 넣은 채 세탁기를 여러번 돌렸다. 나는 끈으로 묶어 끌고 다녀야 한다. 뭐든. 세련이나 트렌드는 나와 맞지 않다.


글을 쓰는 장소는 크게 두 곳,
세부적으로는 네 곳이다.


대부분은 도서관을 향한다. 도서관은 우리집을 기준으로 좌측에 한 곳, 우측에 한 곳있다. 좌측이냐, 우측이냐는 별로 중요한 문제는 아니지만, 오래된 곳을 좋아하는 나는 주로 우측으로 향한다.


도서관이 쉬는 월요일이나, 마감해서 출력 및 우편접수가 필요한 날은 시간을 아낄 수 있는 동네 카페로 향한다. 마지막 네번째 장소는 도서관에 가려다가 급, 싫어지는 날 방향을 돌려서 가는 삼거리 아랫방향 카페다.


요즘은 가끔 생각이란걸 한다.


걷는 동안 대개는 생각이 없고, 귀에 꽂힌 음악에 충실하지만 요즘은 가끔 생각을 한다. 장편에 도전하고 있는데, 주로 주말에 쓴다. 지난 주말, 내가 던진 그 삶을 나의 주인공들이 어떻게 살고 있을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그래서 그들이 어떤 결심을 하게 될지, 행동의 변화가 궁금하다. 그들의 하루를 나의 하루 위에 얹어본다.각자 잘살다 주말에 다시 만나자.


도서관이나 카페에 도착해서
딱 3시간 글을 쓴다.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늘 한정적이다. 안타깝게 타고난 게으른 성격을 거스르며 살아가는 중이다. 때리는 사람도 없는데, 채찍을 맞은 경주마처럼 그날의 글감을 쓴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역시 한시간을 걷는다.


음악을 듣는 이어폰 외 모자도 쓴채로 걷는다. 지지난 여름은 너무 볼품없이 타서 깜짝 놀랄 정도로 흉해져서 낮시간 걸을 때는 모자를 쓰기로 했다. 편의성을 위해 돌돌 말리는 밀짚? 라탄? 모자를 쓴다. 두꺼운 파카를 껴입고 배낭을 메고 정수리가 뚫린 한여름 모자를 쓴다. 누가 봐도 크게 개의치 않는다. '꾸안꾸'라고 혹자는 얘기하지만, 글을 본격적으로 쓰겠다 마음먹은 작년 봄부터는 그냥 '안꾸'다.


참, 요즘 꽂힌 음악은

Meghan Trainor 의 <Made you look>


I could have my Gucci on
난 구찌를 입을수도 있고

I could wear my Louis Vuitton
루이비통을 입을수도 있지

But even with nothing on
하지만 그런거 없어도

Bet I made you look
넌 나만 보게 될걸

I'll make you double take
soon as i walk away
내가 지나가면 깜짝 놀라서 뒤돌아볼걸

Call up your chiropractor
just in caseyour neck break
나 보다가 너 목부러져서
병원예약해야 될거야

집에 와서는 당이 떨어진다.


허겁지겁 마카롱이나 약과 서너개를 먹는다. 숫자에 약한 나는 자주 잊어버려 이따금 우물우물 씹으며 칼로리를 다시 검색한다. 화들짝 놀란다. 하지만 개의치 않기로 한다. 살아야지. 암.


당은 원래 원하는 만큼 모두 채울수 없다. 글에 대한 기대치보다 당에 대한 기대치가 훨씬 높다. 만족할만큼 먹는 일이란 불가능하다. 건강을 생각해 겨우 그만 먹기로 힘겹게 결심하고,

페이를 지급받는 생산적인 일을 하기 시작한다.


부업인지 생업인지는 잘 모르겠다.


그림을 그리거나, 글씨를 쓰거나, 뭔가를 만들거나 한다. 만드는 종류는 ppt와 한글 파일이 있다. 세부내용으로는 강의자료와 글쓰기에 관한 것이다. 최근에는 예전 다니던 회사 팀장님과의 인연으로 블로그 관련 글을 쓰고 있다. 어제오늘은 교정작업 중이다. 의식적으로 집중하겠다는 자발적 쇼차원으로 안경을 쓰고 본다.


저녁을 먹을 시간이다.


식욕은 없어 밥생각이 별로 없다. 하지만 음식을 먹으면 없던 식욕이 신기하게 샘솟는다. 요리는 꽤 잘하는 편인가?


저녁을 먹고나서는 산책을 나간다. 집근처 천변을 돈다. 구예산이 마땅치 않을리 없을 것 같은데 가로등을 설치해주지 않는 이유는 꽤 오래 고민했지만, 어둠은 익숙해 지는 법이다. 어둠 속에서 물소리를 듣는다. 천변에서 이따금 나는 소리가 수달의 소리라는 것을 얼마전 알았다. 이제 물소리와 수달소리를 즐긴다.


집으로 도착하니, 벌써 늦었다. 씻고 책을 본다.


책을 펼치자 거의 잘시간 임박이다. 책이 재미있어서라기 보단 늘 쫒기듯 책을 보기에 항상 아쉬운 마음으로 책장을 덮는다.


9시 반, 잔다. 행복하다.


오늘은 무슨 꿈을 꿔볼까, 상상하지만 상상한대로 꿈을 꿔본적은 단한번도 없다.


하지만 상상만으로도 늘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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