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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각 Jan 10. 2024

아름다운 곳에 털썩 앉아 그림그리는 할머니가 되고 싶어

프롤로그

  오래 멘 가죽 가방, 포근하고 귀여운 니트와 치마, 동그란 안경과 은발의 단발머리. 밴쿠버에서 처음으로 어반스케치 모임에 나갔을 때 내 마음을 사로잡은 것은 귀여운 할머니들이었다. 할아버지도, 대학생도, 중년의 사람도 있었는데 유독 나란히 앉은 할머니들에게 눈길이 갔다. 나이가 지긋한 할머니들은 느릿 느릿 풍경을 스케치북에 담았고, 2시간 후 각자의 그림을 가지고 다시 모였을 때 내 그림이 따뜻하고 예쁘다며 칭찬을 해주셨다. 그 얘기를 하실 때의 다정하고 선한 눈빛이 선명하다.


  며칠 전 어반스케치 모임을 갔을 때도 역시 할머니들에게 눈길이 갔다. 언제나 비가 오고 습한, 축축하게 추운 밴쿠버의 겨울인데 비가 안 와서 벤치에 앉아 그림을 그릴 수 있었다. 강아지들이 목줄 없이 뛰놀 수 있는 해변가에 앉아서 행복한 사람들과 뛰노는 개들, 통나무와 바다를 즐거운 마음으로 스케치 하고 있었는데, 30분 쯤 지나자 몸 속까지 시려와서 더는 밖에 있을 수 없었다. 색칠은 실내에서 하려고 이동하는데 이곳 저곳의 벤치에 앉아있는 할머니들이 눈에 띄었다. 젊은 나는 추워서 도망가고 있는데 할머니들은 폭닥한 목도리를 칭칭 감고 집중한 채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2시간 후 다시 만나서 서로의 그림들을 바닥에 주륵 늘어놓고 대화를 나눴다. 나는 내 그림이 마음에 들지 않아 부끄러웠다. 다른 사람들의 그림을 보니 개성 있고 예뻐서 마음이 무거워졌다. 사실 강아지들이 뛰노는 해변을 스케치할 때까지만 해도 꽤 집중하며 재미있었는데, 수채 물감으로 채색을 하는 동안에 아름답지 않고 멋지지도 않아서 그다지 즐겁지 않은 기분으로 그림을 완성했다. 잘 하고 싶다는 마음이 솟아나자 느릿 느릿 조금씩 그려오던 오랜 취미의 즐거움이 쪼그라들고 말았다. 밖에서 짧은 시간동안 눈에 담긴 풍경을 그리고 싶어서 쓰는 간편한 물붓과 고체물감이 별로라 그런가? 하고 도구 탓을 했다가, 원래는 풍경만 그리다가 지난 10월부터 풍경 속에 사람을 넣기 시작했는데 사람들의 비례가 안맞고 어색해서 보기 싫었다가, 행복하게 뛰노는 강아지들의 모양이 이상해서 답답했다.

서로 다르게 예쁜 그림들


  그런데 사람들이 각자의 그림을 들어올려 자유롭게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 마음에 바람이 스윽 지나가는 듯 했다. 오래 메어 반질반질해진 귀여운 가죽 가방을 매고 있던 할머니가 그랬다. 검정색 펜 하나로 꼼꼼하게 그려진 그림을 보여주며, 모든 디테일들이 사랑스러워서 열심히 그렸다고. 그런데 이 한장을 그리고 나니 너무 피곤해져서 그 다음부터는 수채 물감을 썼다고. 스케치북의 다음 장에는 두꺼운 붓으로 슥슥 색칠한 자전거 타는 사람이 그려져 있었고, 그 다음 장에는 역시 대충 슥슥 칠한 강아지 두 마리가 그려져 있었다. 마지막 장에는 만남 장소로 돌아오는 길에 해가 지는 빛깔이 너무 예뻐서 그 자리에 앉아서 그릴 수밖에 없었다는, 바다와 해변의 색이 채워져 있었다. 꼼꼼하고 정확하게 그려진 건 아니지만 할머니의 눈을 통과한 여유롭고 건강한 밴쿠버의 모습이 내게 와닿았다. 또 다른 할머니는 그림을 그리는 동안 나무의 모양, 바다의 빛깔, 하늘의 구름들이 다 너무 아름답게 느껴졌다고 했다. 내가 그리는 동안 내 그림의 부족함에 답답함을 느끼고 있을 때, 작은 에너지로 천천히 움직이는 할머니들은 풍경의 아름다움을 바라보고 편안하게 스케치북에 옮겼다.


  타박 타박 걸어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나도 때로는 감동하고 때로는 즐거운 기분으로 바라본 어떤 모습을 언제나 그리는 사람이고 싶어졌다. 나이가 지긋하게 들어도 지속할 수 있는 일이라는걸 모임에서 다시금 느꼈고, 할머니가 되어서도 언제 어디서나 털썩 앉아서 마음을 움직이는 풍경을 담고 싶어졌다. 그런데 그림을 자주 그리지는 않는다. 사람들이 녹아든 생생한 그림을 그리고 싶은데 연습을 안한다. 그러니까 내 그림이 마음에 들지 않고, 그리는 과정이 즐겁지가 않다. 그러니 그림을 그리는 과정이 다시 순수하게 즐거워지도록 지금 할 수 있는 일을 해야겠다. 매일 사람 한 명이라도, 스케치 조금이라도 하면서 시간을 쌓아가야겠다. 지금 내 바람이 진심인 것 같아서 어반스케치를 삶 가까이에 두는 것을 매 주 글로 남겨보려 한다. 그 끝에 내 그림이 좀 더 나아지는 것도 좋고, 그림 그리는 과정을 좋아하는 마음이 좀 더 깨끗해지는 것도 좋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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