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how much가 아니라 how long이다.

by 황금지기 Mar 15. 2025

어디에도 정답은 존재하지 않고, 경험적으로 체득하는 과정에서 통찰할 수밖에 없는 투자의 본질은 관점과 평정심의 how long이므로 노력과 직감을 믿고 나아가면 모든 게 선명해지게 된다. 경험적 통찰은 오직 시간의 경과를 양분으로 성장하므로 끊어버리고 다음 수를 기약하면 늘 설레는 꽃길이다. 파동은 변덕 심한 새침데기 아가씨 마음과 같아서 따라가면 외톨이가 되고, 미숙하거나 조급하면 늘 동전만 줍다가 끝나게 된다. 시장을 이해하고 내면이 성장하고 있다면 반드시 누적으로 증거금을 키워가야 한다.



     

보통 수익의 how much가 목표가 되고, 기법을 통한 how much를 꿈꾸지만, 대부분은 실패한다. 투자의 본질은 관점의 how long과 평정심의 how long이다. 대부분 기법이란 신기루를 찾아 헤매다 사라지고 만다. how much를 만드는 건 how long이고, how long의 토대인 관점의 일관성과 평정심은 투자 심리에 뿌리를 두고 있다. 아닐 때, 틀렸을 때, 명백한 불운이 닥쳤을 때, 너무나도 터무니없는 일이 벌어졌을 때, 확률적으로 일어나지 않을 일이 거듭될 때 언제 어디서든지 무슨 일이든 일어날 수 있다는 확률론자=등락론자로서의 심리 상태가 그게 실력이다.          




“두려워해선 안 돼요. 앞을 향해 달리는 겁니다. 의심을 버리고, 자신의 마음을 믿고.” 벽의 웃음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고개를 들지 않고 똑바로 달려 그 앞에 있을 벽으로 돌진했다. 여기까지 온 이상 그림자의 말을 믿는 수밖에 없다.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나는 온 힘을 쥐어짜 의심을 버리고 나 자신의 마음을 믿었다. (중략) 나는 정말 올바른 장소로 향하고 있을까? 그저 엉뚱한 방향으로, 엉뚱한 방식으로 나아가는 건 아닐까? 그렇게 생각하면 몸 여기저기의 근육이 굳어버렸다. 그래서 최대한 아무 생각도 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머릿속을 텅 비워야 한다. 그리고 내 안에 있는 직감을 – 논리로는 설명되지 않는 방향감각을 – 믿고 앞으로 나아가는 수밖에 없다.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확률과 그 불확실한 벽을 믿고 매번 ‘to be or not to be(사느냐! 파느냐! or 보유하느냐! 청산하느냐!)’ 선택해야만 하는 투자자의 무아(無我)란 이러해야 하지 않을까? 노력과 직감을 믿고 나아가면 모든 것이 선명해지게 된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표현대로 ① 때가 되면 동이 트고, 이윽고 햇살이 창으로 흘러드는 것처럼. ② 나그네가 자기도 모르는 사이 중요한 의미가 있는 분수령을 넘어버린 것처럼.




매일 정해진 행동 패턴을 하나하나 정확히 짚어가며 답습하는 건 그에게 분명 중요한 의미일 것이다. 행위의 본질이나 방향성보다 반복 자체가 목적인지도 모른다. 불꽃은 마치 살아 있는 것 같았다. 숙달된 무용수처럼 가늘게 몸을 떨고 크게 흔들었다가, 때로 깊고 덧없는 한숨을 뱉고, 낮게 가라앉고, 그러고는 또 재빨리 몸을 일으켰다. 뭐라고 열심히 말을 걸어오는가 싶더니, 금세 조심스럽게 귀 기울여 들었다. 눈꼬리를 날카롭게 추켜올렸다가, 동그랗게 뜨고 부라렸다가, 이윽고 질끈 감았다. 나는 그런 불꽃의 모습을 주의 깊게 관찰했다. 나에게 무슨 중요한 가르침을 주지 않을까 기대하면서, 그러나 그들은 아무것도 가르쳐주지 않았다. 힌트조차 주지 않았다. 그저 무음 속에서 시간이 흘러갔을 뿐이다. 그래도 상관없다. 필요한 건 적절한 시간의 경과였다.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불꽃에 대한 묘사가 마치 언제 어디에서 어디로 향할지 도무지 알 수 없는 파동에 대한 묘사와도 같은 것 같다. 어디에도 정답은 존재하지 않고, 경험적으로 체득하는 과정에서 통찰할 수밖에 없는 게 파동의 흐름이다. 투자에서의 성공은 체계적 훈련과 인문학적 소양 그리고 돈이 되지 않는 시간을 견디면서 오직 경험적으로 체득한 확률이 높은 쪽으로 반복하는 시간의 경과만이 유일한 길이다.




내 의식과 내 마음 사이에는 깊은 골이 있었다. 내 마음은 어떤 때는 봄날의 들판에서 뛰노는 어린 토끼이고, 또 어떤 때는 하늘을 자유롭게 나는 새가 된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내 마음을 제어하지 못한다. 그렇다. 마음이란 붙잡기 힘들고, 붙잡기 힘든 것이 마음이다.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추격은 chase이고, 혼돈은 chaos다. 영어단어의 유사성을 봤을 때도 추격(chase)하면 혼돈(chaos) 속에서의 고립(isolation)을 자초하게 된다. 성을 잘 방어했고, 충분한 전과를 거두었음에도 작은 것을 욕심내거나 혹은 자만심에 도취하여 적의 유인 전술에 말려 성문을 열고 추격하다 성마저 빼앗기는 경우가 역사에 얼마나 많은가! 인생사 선택이 그렇듯 투자자도 잦은 실수투성이자 언제든 큰 사고를 칠 수 있는 사고뭉치일 수밖에 없지만, 추격하다 고립되지 않으면 늘 꿈꾸는 봄날이다. 끊어버리고 다음 수를 기약하면 늘 설레는 꽃길이다.




경험(experience) + 통찰(insight) = 경험적 통찰(ex-insight) 확률과 언제 어디서든지 허물어질 수 있는 불확실한 벽에서 시장과 마주해야 하는 투자자에게 lower leverage는 벽을 견고하게 해 주고, less isolation은 벽을 단단하게 해 준다. 그렇게 올바르게 경험하는 시간의 경과 속에서 경험은 통찰에 닿게 되고 불확실한 벽을 어느 순간 확실한 벽으로 바뀌게 한다. 누구나, 언제든지, 어디에서나 실수할 수밖에 없고, 감정에 치우칠 수밖에 없지만, 적어도 절대 파산하지 않고 경험적 통찰을 쌓아가는 필연의 ‘돈이 되지 않고 세공되면서 금이 깎여나가는 시간의 경과(the course of time)’를 견디게 해 주는 게 바로 lower leverage다. 더해가는 통찰의 깊이는 시간의 경과가 필연이듯이 그 과정에서 숱한 실수가 밤하늘의 별처럼 더해갈 것이다. 지속 가능성의 고원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배우고 익혀 틀을 세우되 그 틀에서 벗어나야 한다. 시간으로 영리해지면서 기존의 것은 새로움으로 변하게 되므로 ‘틀에서의 자유’는 오직 시간의 경과를 견뎌낸 경험적 통찰을 통해서만 얻어진다. 모든 투자자가 그토록 갈구하는 경험적 통찰은 오직 시간의 경과를 양분으로 성장한다.

  



확률을 다룰 때는 디테일의 함정(the trap of detail)에 유의해야 한다. 많은 것들에 집착할수록 작은 흐름에 꽂히게 되고 큰 흐름을 보지 못하게 되지만, 이 과정 역시도 모든 투자자의 필연이다. 큰 흐름은 단순함과 맥을 같이 한다. 전날에 이은 큰 흐름을 보면서 확률적 우위를 점하기 위해서는 ‘그럼에도’ 과감하게 복잡함 속에 뛰어들어 단순함을, 원칙을 건져내야 한다. 투자자에게 원칙이란 ‘선인들의 선례’를 통해 배우고 익힌 신의 말씀과도 같다. 하지만 그 말씀대로 습관이 되기 위해서는 절망의 계곡으로 떨어지고, 깨달음의 비탈길을 오르는 ‘시간의 경과’가 필요불가결이다. 시장에서는 누구나 받들어 새긴 말씀을 어기면서 방황하게 되고 가출을 반복하는 사춘기적 시기를 거치면서 성장하게 된다.   




호흡이 가빠지더라도 지금 하지 않으면 가슴이 터져나갈 것 같더라도 추격해서는 안 된다. 추격의 횟수만큼 수익률은 떨어진다. 본질은 확률 게임이고, 추격의 확률은 극히 낮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추격의 유혹을 뿌리치고 보내면 본전이고, 그렇게 잃지 않으면 다음 수는 더 여유로워진다. 파동은 변덕이 심한 새침데기 아가씨 마음과 같아서 좋다고 따라가면 외톨이가 되기 일쑤다. 그녀가 돌아 나올만한 자리에서 우연을 가장하여 기다려야 한다. 뒤돌아가면 따라가지 말고 보내야 다음을 기약할 수 있고, 한참 동안 기다렸는데도 멈추지 않고 지나쳐가면 그때도 여유롭게 보내야 한다. 




부득탐승(不得貪勝) ‘승리를 탐하면 이기지 못한다.’ 조급하게 수익을 탐하면 미숙해지고, 미숙하면 조급해진다. 둘은 언제나 절친한 친구다. 마치 동전의 양면처럼 미숙하거나 조급하면 늘 동전만 줍다가 끝나게 된다. 승리를 탐하면 파동의 끝자락에서의 ‘더 올리는 척’ ‘더 내리는 척’하는 설거지 파동에서 상대가 버리는 돌을 잡게 된다. 명량대첩을 보면 울돌목이란 절대적으로 유리한 자리에서 이순신 장군이 적을 기다리듯 그렇게 기다림의 반복이어야 한다. 애매하고, 어렵고, 머뭇거려지는 자리에서 승리를 탐하면 늘 성공을 꿈꾸다가 시간만 가고 애매한 인생이 되고, 어려운 삶이 되고, 값비싼 물건 앞에서 머뭇거리는 일상만이 존재할 것이다. 




태어나 육체가 성장하는 시기에 인간은 생의 모래시계를 채워나가게 된다. 이 시기는 언제쯤 방학이 올까! 언제나 독립해서 살 수 있을까! 좀처럼 가지 않는 시간이 느리게만 느껴진다. 그러다가 육체적 성장을 멈추고 (생의 모래시계가 정점을 찍은 이후) 어느 시점에 시간이 너무 빠르다는 것을, 생의 모래시계가 정점을 지나 줄어들고 있다는 걸 깨닫게 된다. 그때부터 인간 내면의 성장(제2의 성장)은 시작된다. 나이가 들고 모래시계가 정점을 찍고 줄어들기 시작해서야 내면은 성장을 시작할 수 있는가보다. 생이 그렇듯 천성적으로 타고난 극히 소수의 투자자를 제외하고는 각자의 깊이는 다르겠지만, 절망의 계곡 어디쯤엔가 정점을 찍은 후에야 투자자로서의 진정한 성장을 시작하게 된다. 




반드시 누적으로 seed money(증거금, leverage)를 키워야 한다. 아이가 자라면서 커가고 알아가는 것처럼 모든 일에는 때가 있는 법이다. 왜 긴 세월 그토록 실패를 거듭했을까? 돈을 쫓아다니면서 시장을 이기려 했기 때문이다. 돈에 짓눌리게 되면 (가위에 눌린 것처럼) 뇌동과 추격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고, 손실이 발생하면 옴짝달싹하지 못하게 되면서 경험은 전혀 실력으로 이어지지 않는다. 올바른 경험을 쌓아가기 위한 첫 번째 전제는 각자의 심리에 맞는 lower leverage다. 전투에 임하는 중세 기사에 비유한다면 lower leverage는 방패와 같고, less isolation은 전술 교리와 같고, ‘자르고, 등락하면서, 챙기고’를 반복하는 ex-insight는 창과 같다. 

매거진의 이전글 꾸준함은 사철 푸르른 소나무와 같다.

브런치 로그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