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든지 틀리겠지만, 틀려도 상관없어야 버틸 수 있다. 필연적 혼돈 상태를 버티기 위해서는 파산할 만큼, 분별을 잃을 만큼 잃지 않아야 한다. 이기고자 치는 게 성급함이고, 만족은 마음먹기 나름, 마음에 길을 물어 확률 게임을 이해하고 이겨놓고 치는 게 기다림이다. 소중한 시간을 대가로 요구하기에 ‘시장에 맞서지 말고 흐름에 순응하라‘라는 가르침이 유일한 혼돈의 출구다. 기다리고, 대응하지 않고서는 수익 마디를 꺾을 수 없다. 경험적 통찰은 마디를 취하면서 걸음을 디딜수록 나날이 새로워질 것이다.
시장이 언제 어디서 무슨 일을 어떻게 벌일지는 아무도 모르기에 why는 지극히 후행적이므로 사건의 원인에 크게 의미도 두지 않아야 한다. why를 찾고 고민하는 게 뇌동으로 향하는 길이다. 아무도 모른다는 대전제가 인식의 전반을 지배하게 되었을 때 비로소 확률적 사고의 문이 열리게 된다. 언제든지 틀리겠지만, 어디서 틀려도 상관없어야 확률적 사고다. lower leverage와 less isolation에 기반한 이 확률적 상태를 내공이라 부른다. 이후 시간 속에서 자연스럽게 쌓이는 경험은 통찰로 이어지게 되고 이를 통틀어 손이 저절로 반응하는 감각이라 부른다. 올바른 경험이 시간의 경과 속에서 통찰을 잉태한다. 인간은 진화론적 생존본능으로 내어놓을 줄 모르는 이기심(利己心)으로 인해 도박적 사고를 하지만, 시장은 확률의 세계이고, 투자는 확률 게임이다. 확률을 제대로 다루기 위해서는 손실을 받아들이고 실수를 인정하는 이타심(利他心)으로 인식을 전환해야 한다.
다수는 시장을 만만하게 보고 돈을 좇아 제대로 된 준비도 없이 그냥 무작정 뛰어들기에 대부분 실패할 수밖에 없다. 시장과의 게임은 치열하게 싸워서 이기는 게 아니라 적당히 깨지면서 버티는 게 본질인데 말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기다리면서 버티는가? 시장이 돈을 벌어주는 시기가 있다. 주식시장에서는 몇 년에 한 번씩은 결국에는 오고야 마는 대세 상승장을 기다리면서 버티는 게 본질이다. ‘숲을 보고 나무를 보라’는 시장의 격언과 일맥상통하는 말이고, 멀리 보면서 천천히 투자해야 하는 이유다. 파산하지 않고 버티기 위해서는 파산할 만큼, 분별을 잃을 만큼 돈을 잃지 않아야 한다. 잃지 않기 위해서는 자기 내면을 끊임없이 들여다보면서 자기 심리를 알고 경험하면서 통찰하는 과정이 필연적일 수밖에 없다.
혼돈은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이라는 가정의 문제가 아니라 ‘언제 일어나는가?’하는 시기의 문제다. 이 세계에서 확실한 단 하나이며, 우리 모두를 지배하는 주인이다. 과학자인 나의 아버지는 일찍이 내게 ‘열역학 제2 법칙’은 절대 벗어날 수 없다고 가르쳤다. 엔트로피는 증가하기만 할 뿐, 우리가 무슨 짓을 해도 절대 줄어드는 일은 없다고 말이다. 똑똑한 인간은 이 진리를 받아들인다. 똑똑한 인간은 이 진리에 맞서 싸우려 하지 않는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 룰루 밀러>
네이버 지식 백과에서는 열역학 법칙을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열역학 법칙은 우주의 에너지가 항상 일정하다는 제1 법칙과 우주의 엔트로피는 항상 증가한다는 제2 법칙으로 구성된다. 엔트로피 법칙인 제2 법칙은 자발적 과정의 방향성을 나타내는 자연계 최고 법칙이다. 볼츠만의 표현에 따르면, 엔트로피는 무질서 정도에 대한 척도이므로, 우주는 결국 더 무질서한 상태를 향해 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투자의 세계에서도 잠깐 초심자의 행운을 지나면서 지식이 더해갈수록 마찬가지로 혼돈은 가중된다. 정답이 존재하지 않는 확률의 세계에서의 필연적 혼돈이다. 그려지는 파동은 심리의 합이기에 그려지는 모든 파동은 단지 확률적일 수밖에 없다. 어류라는 범주가 존재하지 않듯이 잠깐의 착각일 뿐 절대적 기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현명한 투자자는 정답을 찾을수록 혼돈은 증가할 뿐임을 알고 맞서려 들지 않는다. 체계적인 훈련 과정에서 선인들의 선례 ‘시장과 맞서지 말고, 흐름에 순응하라’라는 가르침이 출구인 이유다.
상승과 하락 그리고 횡보 즉 박스 구간이 존재하기에 수익으로 이어질 확률은 매번 33%로 보는 게 타당하다. 만인의 것인 이기고자 성급함을 극복하지 못하고 덤벼들면 시간 속에서 필패하게 되는, 많은 개인투자자가 실패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이것이다. 횡보 구간을 제대로 이용할 수만 있다면 잃지 않을 확률은 66%가 되므로 반복하면 확률적으로 잃지 않는 투자자가 될 수 있는 것도 같은 이치다. 절대 돈에 눌리거나 쫓기서는 시장을 이길 수 없고 스스로 힘들어질 뿐이다. 투자는 심리 게임이다. 한방과 기도에 바탕을 둔 과도한 leverage로 투자 심리가 흔들리지 않도록 해야 하며, 원칙을 지키지 않는 뇌동 즉 성급함에 바탕을 둔 추격을 경계하고 또 경계하여 횡보 구간을 잃지 않는 구간으로 바꾸어야 한다. 투자에서 이기고자 치는 게 성급함이고, 박스를 이해하고 66% 확률 게임을 이해하고 이겨놓고 치는 게 기다림의 미학이다. 축구에서도 수비가 되지 않으면 아무리 공격이 강해도 공격이 제대로 되지 않듯이 파동의 횡보 구간을 이해하지 못하고 수익만 좇아서는 제대로 챙기기도 힘들고 그 귀결점은 다수가 가는 그곳이다.
파동을 그리면서 확률적 사고로 유리한 방향으로 반복할 수 있다며 비로소 내공이 쌓였다는 의미다. 성공은 경험에서 잉태되므로 원칙을 지키면서 마디를 취해가는 경험이 쌓여 마디에서 등락하는 통찰로 이어지게 되고, 통찰은 절대 잃지 않는 감각이 된다. 중요한 건 마음에 꺾이지 않는 마음이다. 제대로 즐기기 위해서는 제대로 자제할 줄 알아야 한다. ‘영원을 원한다면 영원히 조심하는 수밖에 없다’라는 말처럼 말이다. 인생에서 우연과 우연이 겹치면서 만들어가는 결과는 선택할 수 없지만, 과정에서 just do it 즉 생각 없이, 불평 없이 그냥 하는 최선은 선택할 수 있다. 만족할 줄 알아야 손실을 자를 수도, 이익을 챙길 수도 있다. 만족은 마음먹기 나름이므로 각자의 마음에 길을 물어야 한다.
더크워스는 그 비밀의 요소라 여겨지는 한 가지 특징을 발견하고 그 특징을 ‘그릿 grit(끈질긴 투지)’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릿, 끈질김을 뜻하지만, 그보다 귀에 착 붙는 단어, 그릿. “긍정적 피드백”이 없는데도 “매우 장기적인 목표”에 로봇처럼 뛰어들게 해 주는 것, 그릿. 머리로 벽을 반복적으로 들이받을 수 있는 능력. 더크워스는 거의 모든 직업에서 정상에 선 사람들에게서 그릿을 발견했다. 재능, 창의력, 친절함, IQ는 다 잊어라. 순수한 그릿이야말로 앞으로 나아가게 해 주는 바로 그것인 것 같았다. (중략) 그릿이란 여러 특성이 섞인 칵테일 같은 것이지만, 그중 가장 중요한 특징이 바로 이것이다. 좌절을 겪은 뒤에도 계속 나아갈 수 있는 능력, 자신이 추구하는 것이 이루어지라는 증거가 전혀 없는데도 계속해 나갈 수 있는 능력, 또는 더크워스의 표현을 빌리면 “실패와 역경, 정체에도 불구하고 수년간 노력과 흥미를 유지하는 것” 말이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확률을 잘 다루기 위해서는 당연히 확률적 사고를 해야 한다. 하지만, 인간의 뇌는 진화론적으로 확률적 사고와 잘 맞지 않기에 한방과 기도, 뇌동과 추격, 절망의 계곡과 깨달음의 비탈길은 보편적인 과정이 된다. 확률에 취약한 인간이 ‘자본주의의 꽃’ ‘돈이 은빛 물결로 넘실대는 곳’ 투자라는 세계의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잃지 않기 위해서도 너무나도 긴) 시간이 필요하다. 시장의 돈은 각자의 소중한 시간을 대가로 요구한다. 그 필연의 시간을 견뎌야 하기에 시장에서 요구되는 덕목은 ‘똑똑함’보다는 ‘꾸준함’이다.
상황이 바뀌면 그 상황에 어떤 특징이 더 유용하게 적용될지는 아무도 모르는 법이다. 다윈은 간섭하지 말라고 특별히 강력하게 경고한다. 그가 보기에 위험한 것은 인간의 눈에서 비롯된 오류 가능성, 복잡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우리의 무능력이다. “적합성에 대한 우리의 관점에서는 불쾌하게 보일 수 있는 특징들이 사실 종 전체나 생태에는 이로울 수도 있고, 혹은 시간이 지나고 상황이 바뀌면 이로운 것이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인간은 눈에 보이는 외부 형질에만 영향을 미칠 수 있지만, 자연은 외양에는 전혀 신경 쓰지 않는다. 자연은 모든 내부 기관과 모든 미세한 체질적 차이에, 생명의 전체 조직에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이것이 바로 다윈이 예언했던 그런 상황이다. 그가 지구의 수많은 생명의 순위를 정하지 말라고 그토록 뚜렷이 경고한 이유는 어느 무리가 승리하게 될지 인간은 결코 예측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파동도 자연과 같고, ‘시간에 흐름에 맡겨두라’라는 다윈의 가르침은 너무나도 훌륭하게 적용된다. 아무리 확률이 높아도 ‘맞음 & 틀림’이 매번 공존하는 게 확률의 세계다. ‘고점에서는 매도하는 게, 저점에서는 매수하는 게’ 유리함을, ‘손실은 짧게 자르고, 이익은 길게 가져가는 게’ 유일함을, 원칙이란 큰 틀 안에서 들고남을 반복해야 실력이 쌓인다는 걸 경험적으로 깨지면서 깨치면서 가다 보면 통찰력은 스스로 깊이를 더해가게 된다. 그러기 위해서는 터무니없는 확신과 자만심과 같은 감정의 무게를 내려놓고 흐름에 순응하기 위한 더딘 시간이 필요하다. ‘시장과 맞서지 말고 흐름에 순응하라’라는 가르침이 유일한 혼돈의 출구인 이유다.
돈을 이길 방법은 없고, 결국 모든 게 다 괜찮아질 거라고 보장해 주는 안내자도, 지름길도, 마법도 주문 따위도 없다. 우리는 우리를 둘러싼 세계를, 우리 발밑의 가장 단순한 것들조차 거의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 말이다. 우리는 전에도 틀렸고, 앞으로도 틀리리라는 것, 진보로 나아가는 진정한 길은 확실성이 아니라 회의로, “수정 가능성이 열려 있는” 회의로 닦인다는 것.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
언제 어디서나 틀릴 수 있음을, 위험에 크게 노출되면 언제 어디서나 파산할 수 있음을 깊이 인정한 이후에야 그 회의 너머에 깨달음의 비탈길이 보게 된다. 위험을 알고 최소화함으로써 파산하지 않고 반복할 수 있게 될 때 (감정과 이성이 최소한 무게 중심을 이룰 때, 돈과 심리가 동일 선상에 있을 때) 비로소 깨달음의 비탈길을 오르게 되고, 확률을 다루는 경험, 마디를 취하는 과정에서 확률을 바라보는 통찰력은 깊어진다. 경험적 통찰(ex-insight)은 등락하는 마디를 취하는 횟수와 궤를 같이한다.
투자의 길은 ‘필연적 혼돈이지만, 꾸준함을 유지하다 보면 예측할 수 없음을 깨치게 되고 맞을 수도, 틀릴 수도 있음을 내면이 인식하게 되면서 끊임없는 혼돈 속에서 나름의 확률적 질서를 찾아가게 된다’라는 관점으로 접근해야 하지 않을까? 「물고기는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책을 통한 작은 깨달음이다. 절대 기법으로 승부가 갈리지 않는다. ‘절대 기법은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기다리고 대응하면서 반복하면서 마디를 꺾어나갈 수 있는 심리에서 승부가 결정된다. 파동의 등락을 오랜 시간 바라다보면 ‘오르고 있구나! 내리고 있구나!’ 큰 흐름이 보이게 된다. 마디를 취한다는 건 ‘진입하고, 자르고, 챙기고, 갈아타고’를 반복한다는 의미다. 기다리고, 대응하지 않고는 마디를 꺾을 수 없다. 한두 마디는 쉽게 부러지지만, 쌓이면 쉽게 꺾이지 않듯, 몇 번의 성과는 언제든 실패로 이어질 수 있지만 그것이 쌓이면 실력이 된다.
가는 파동에서는 유리한 방향이 확률적 우위로 반복을 가능케 할 것이고, 가지 않는 파동에서는 추격하지 않았다는 게 반복을 축제의 단계로 승화시킬 것이다. 되뇌어본다. ‘아무도 나처럼 하지 않았기에 이것을 나처럼 잘할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이다.’ 절대 파산하지 않고 게임의 지속성을 보장하는 ‘lower leverage’와 ‘less isolation’은 시소의 중심에서 (동일 선상에) 돈과 심리의 균형을 잡아줄 것이다. 이러한 균형이 이루어진 다음에야 비로소 삼각형의 꼭짓점을 향해 꿈꾸던 산의 능선을 따라 오를 수 있게 된다. 경험적 통찰은 정상을 향해 걸음을 디딜수록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 즉 날마다 새로워지고 또 나날이 새로워질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