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맞고 틀리고는 밑 빠진 독에 시간 붓기다.

by 황금지기 Mar 26. 2025

틀려도 상관없이 유리한가의 문제로 접근할 수 있느냐가 투자자의 기본 소양이다. 시장에서 진짜 돈을 벌어주는 건 숲을 보면서 길을 찾아가는 지수와 심리다. 파동을 그린다는 건 전날에 이은 큰 흐름을 파동이란 창을 통해 보는 것이므로 그릴수록 타점이 선명해진다. 시장에는 answer가 단지 possibility로 존재하기에 버티는 건 객관적 시선으로 현상을 보기 위함이다. 정답은 심리이기에 원칙을 잃으면 혼란은 한없이 깊어질 뿐, 수수께끼 같은 가능성의 자투리가 반복의 과정에서 경험적 통찰의 양분이 된다.




시장에서 맞고 틀리고는 밑 빠진 독에 소중한 시간을 붓는 것과 다르지 않다. 맞거나 틀림, 옳고 그름의 문제를 넘어서서 아무리 틀려도 상관없는 상태로 단지 어느 쪽이 유리한가의 문제로 접근할 수 있느냐가 투자자의 기본 소양이다. ‘어느 쪽이 유리한가?’는 확률적이기에 확률적으로 접근할 수 있는 뇌 구조가 투자자의 적합성이다. 배움의 과정에서 원칙을 세우고, 다짐해 보면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다. 기본적인 뇌 구조가 도박적이기에 확률의 세계에 발을 들인 투자자의 뇌는 마치 ‘밑 빠진 독’과 같아서 아무리 원칙이나 다짐을 넣어도 잠시 잠깐 머물다 어느 순간 사라지고 만다. 작심삼일(作心三日)도 버거운 투자자가 확률의 세계에서 맞는 확률적 사고를 하기 위해서는 ‘밑 빠진 독’을 메워가는 체계적인 훈련과 인문학적 소양의 과정이 필수일 수밖에 없다.




주식시장에서의 대표적인 착각이 바로 마치 나무를 보고 길을 찾는 것과 같은 종목이나 섹터가 돈을 벌어준다는 것이 아닐까? 시장에서 진짜 돈을 벌어주는 건 숲을 보면서 길을 찾아가는 지수와 심리다. 아무리 좋은 종목이나 섹터를 잡아도 원하는 만큼 수익을 챙기는 건 대단히 어렵고, 선택한 종목이 아무리 좋아도 시장이 맞춰주지 않으면 어렵기는 매한가지다. 숲을 보아야 큰 흐름을 가늠할 수 있고 크게 가늠해야 마음도 편안한 법이다. 즉 지수를 보아야 심리가 많이 여유로워진다. 진짜 돈을 벌어주는 건 ‘싸게 사서, 비싸게 팔 수 있는’ ‘손실은 짧게, 이익은 길게 가져갈 수 있는’ 심리다. 심리가 굳건해야 나무가 아니라 숲을 보게 된다. 돈이 되지 않는 시간을 버티면서 ‘까르띠에’로 세공된 투자 심리가 돈을 벌어주게 되는 게 시장 이치다.




흐르는 강물처럼 파동은 끊임없이 등락할 뿐이다. 제대로 된 진입을 해도 확률적으로 당연한 손실은 쉽게 복구할 수 있지만, 추격하게 되면 성급함이 눈을 가리게 되고, 원칙은 그만큼 흐려지고, 쉽게 뇌동으로 빠지게 된다. 추격은 잦은 고립을 자초하게 되고 뇌동으로 가는 길목이다. 횡보 흐름이 존재하기에 추격하게 되면 (횡보장은 지원군이 아닌 적군이 되어) 확률은 33%가 되어버림을 이해해야 잃지 않는 투자자가 된다. 투자가 어려운 이유는 동전 던지기 50% 확률로 잘못 알고 있어 동전 던지듯이 투자하기 때문이다. 강하게 추세를 형성하는 파동은 적고 대개 박스 흐름이 많다는 걸 제대로 알아야 추격하지 않고 기다릴 수 있다. 언제든지 박스 흐름일 수 있다는 걸 이해하면 추격하지 않게 된다. 투자의 세계에서 추격은 패가망신의 지름길이고, 추격하게 되면 방향성만 잃는 게 아니라 투자 심리도 잃게 된다. 색으로 세상을 보면 세상이 선명해진다. 늦겨울 성묫길에서 푸르른 건 소나무뿐이다. 마디로 파동을 그리면 타점이 선명해진다.




어떤 경우에는 운명이라고 하는 것은 끊임없이 진로를 바꿔 가는 국지적인 모래폭풍과 비슷하지…, 그 폭풍은 그리니까 너 자신인 거야. 네 안에 있는 무엇이라고 생각하면 돼. 그러니까 네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모든 걸 체념하고 그 폭풍 속으로 곧장 걸어 들어가서 모래가 들어가지 않게 눈과 귀를 꽉 틀어막고 한 걸음 한 걸음 빠져나가는 일뿐이야…, 그 모래폭풍이 그쳤을 때, 어떻게 자기가 무사히 빠져나와 살아남을 수 있었는지, 너는 잘 이해할 수 없게 되어 있어. 아니, 정말로 모래폭풍이 사라져버렸는지 아닌지도 확실하지 않게 되어 있어. 그러나 이것 한 가지만은 확실해. 그 폭풍을 빠져나온 너는 폭풍 속에 발을 들여놓았을 때의 네가 아니라는 사실이야. 그래 그것이 바로 모래폭풍의 의미인 거야.

<해변의 카프카 – 무라카미 하루키> 

파동을 그리는 건 유리한 방향으로 마디를 취하기 위함이지, 막연한 기대나 무작정 역전을 바라는 마음을 위한 안식의 도구가 아니다. 마디를 취하는 건 밤의 치명적 위험으로부터 손실을 최소화하기 위함이고, 질량 보존의 법칙 즉 확률적으로 그날의 에너지는 정해져 있기 때문이다. 파동은 몇 번씩 뾰족하게 벗어나 보이지만 한두 달 조금만 길게 두고 보면 평균 진폭에 자주 수렴한다. 모래폭풍과도 같이 흔들리면서 그려지는 파동에 따라 등락하면서, 마디를 취하면서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가다 보면 어느 순간 너무나도 낯선 자신을 만나게 될 것이다.




“앞만 보고 가면 안 되지. 너무 앞만 보고 가다가는 발밑에 주의를 안 하게 돼 넘어지기 쉬운 걸세. 그렇다고 발치의 자질구레한 것만 보고 있으면 안 되지. 앞을 잘 보지 않으면, 무언가에 부딪히게 되니까. 그러니까 조금은 앞을 보면서 순서를 좇아 정확히 일을 처리해 나가는 것이 중요하다. 이 말일세. 무슨 일이든 그렇지 않은가.”

<해변의 카프카> 

파동을 그린다는 건 전날에 이은 큰 흐름을 그려지는 파동이란 창을 통해 본다는 의미다. 하지만 무턱대고 큰 흐름에 치우치면 등락하는 파동의 마디마디에서 생겨나는 뾰쪽한 것들에 걸려서 넘어지기 일쑤다. 결국에는 경험으로 알아가는 그들 사이의 조화로움이어야 한다. 마치 차량이 드문 야간 지방 2차선 도로를 달릴 때 눈앞에서 끝없이 이어지는 하얀 실선을 믿고 운전하되 동시에 강한 불빛에 어슴푸레 보이는 몇백 미터 전방도 주시하는 것처럼 말이다.




현재 파동이 어떻게 진행될 것인가? 매번 problem을 마주할 때마다 인간의 뇌는 answer를 찾아야 편안함을 느끼게 된다. 단지 우연과 우연이 겹쳐 만들어진 result를 answer로 인식하게 된다. 시장에는 answer가 단지 possibility로만 존재하기에 시장과 마음의 거리는 좁혀지지 않는 것이다. possibility 세계에서는 result보다 process 즉 대응하면서 만들어가는 과정이 본질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심리이고, 심리는 기다림으로 귀결되고, 기다림의 요체는 ’모든 파동을 다 먹을 수는 없다‘라는 인식에 기반한다. 투자한다는 건 필연의 후회와 아쉬움의 극복이다. 시장에서 현재는 항상 확률적이다. 단지 확률이 높을 뿐이라는, 그래서 반복해야 한다는 인식이 확률적 사고다. 파동은 등락의 확률이 높기에 고점 매도·저점 매수, 손실은 짧게·이익은 길게 가져가는 게 확률의 세계에서 즐기는 반복의 축제다.




주가는 오르락내리락, 왔다 갔다, 흔들흔들하면서 제 갈 길을 갈 뿐인지만, 마치 사랑에 빠져 홍역을 앓듯이 매번 꽂힌 종목이나 방향과 사랑에 빠지기를 되풀이한다. ‘고점이겠지‘ ’내려갈 거야!‘ ’저점이겠지‘ ’올라갈 거야!‘ 이러한 터무니없는 확신에 이끌리는 뇌동이나 ’더 갈 것 같으니까‘ ’나만 두고 갈 것 같으니까‘ 조바심에 참지 못하고 따라가는 추격은 잃지 않기 위해서 반드시 극복해야만 하는 대상이다. 돈과 심리가 동일 선상에 놓이기만 하면 평상심은 온데간데없고 성급함과 초조함과 서두름에 내 마음이 흔들리는 건 시장에는 끊임없이 등락하면서 바람이 불기 때문이다. 인간이기에 필연적으로 주관은 개입될 수밖에 없고, 개입의 정도에 따라 흔들릴 수밖에 없다. 인생도, 사랑도 그렇듯이 객관적 태도가 바로 서지 못하면 주관적 욕구가 언제나 꿈틀거리는 법이다. 치열한 과정을 버티는 건 객관적 시선으로 현상을 바라보기 위함이다.




“숲으로 들어갈 때는 언제나 시야 한쪽에 이 통나무집이 들어 있게 하라고. 그보다 더 안쪽으로 들어가면 길을 잃을 염려가 있고, 일단 길을 잃으면 원래의 장소로 돌아오기 어려워. 나도 혼쭐이 난 적이 있었거든. 이곳에서 불과 몇백 미터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곳에서, 반나절이나 빙글빙글 돌아다녔어. 일본이란 좁은 나라니까, 숲속에서 길을 잃는 일은 없을 거라고, 너는 생각할지도 몰라. 그렇지만 일단 길을 잃으면 숲은 한없이 깊어지는 법이거든.”

<해변의 카프카> 

데이트레이딩에서 통나무집이 바로 원칙으로 정한 선이 꺾이면서 마디가 만들어지는 곳이라 표현할 수 있을 것이다. 꺾인 지점과의 이격을 보면서 절대 추격하지 않아야 하고, 손실이 발생했을 때도 새로 꺾인 지점과의 이격이 커지기 전에 (통나무집이 보일 때) 나오지 않으면 원칙을 잃게 된다. 원칙을 잃으면 혼란은 한없이 깊어지는 법이다.




① 길에서 벗어나면 안 된다. 정해진 규칙을 지키기만 하면 아마 위험은 없을 것이다. 숲은 나를 잠자코 받아들인다. 혹은 보고도 못 본 체한다. 그리고 거기 있는 평온함과 아름다움을 얼마간 나누어준다. 그러나 일단 규칙을 어기면, 거기에 숨어 있는 침묵의 짐승들이 날카로운 발톱으로 나를 사로잡아 버릴지도 모른다.

② 어림짐작으로 나아가면 다시 길 같은 것이 나타난다. 나는 이미 숲에 대해 공포를 느끼지 않는다. 거기에는 어떤 규칙 같은 것이 있다. 혹은 패턴 같은 것이 있다. 일단 두려워하지 않게 되자, 그런 것들이 점점 눈에 보이기 시작한다. 나는 그 반복성을 파악하고 내 일부인 것처럼 만들어간다. (중략) 여기에 있는 숲은 결국 나의 일부가 아닌가-나는 언젠가부터 그렇게 생각하게 된다. 나는 나의 내부를 여행하고 있다. 혈액이 혈관을 더듬어 여행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내가 이렇게 보고 있는 것은 내 안쪽이고, 위협처럼 보이는 것은 내 마음속에 있는 공포의 메아리다. 거기에 쳐진 거미줄은 내 마음이 쳐놓은 거미줄이고, 머리 위에서 지저귀는 새들은 내가 기른 새들이다. 그런 이미지가 내 속에 생겨나고 뿌리를 내려간다.

<해변의 카프카>




하늘을 올려다본다. 하늘에는 밋밋한 잿빛 구름이 떠 있을 뿐이다. 바람은 없다. 나는 계속 걷는다. 의식이 물결치는 바닷가를 나는 걷고 있다. 바닷가에는 의식의 밀물과 의식의 썰물이 있다. 그것은 밀려와서는 글자를 남기고, 금방 다시 밀려와서는 글자를 지워버린다. 나는 파도가 밀려갔다가, 다시 밀려오는 사이에 거기에 쓰여 있는 말을 재빨리 읽으려고 한다. 하지만 쉬운 일이 아니다. 끝까지 읽기도 전에 다음 파도가 그 문장을 지워버린다. 수수께끼 같은 단어의 자투리가 의식에 남을 뿐이다.

<해변의 카프카> 

오랜 시간 파동을 그리고 마디를 따라 선을 그려보아도, 그렇게 꽤 많은 시간이 흘러도 ‘맞음’과 ‘틀림’이, 질서와 혼돈이 파도처럼 교차하는 건 매한가지다. 한동안 잘 정돈된 방식에서 만족스러운 평안을 느끼다가도 어느 순간 거세게 바람이 부는 해변에서 헤매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기를 끊임없이 반복하게 된다. 수수께끼 같은 가능성의 자투리가 반복의 과정에서 경험적 통찰의 양분이 된다. 그 반복의 어디쯤까지 가보지 않고서는 알 수 없는 그것. 그렇다. 이것은 각자가 극복하지 않으면 안 될 과제다. 이제는 꼭짓점을 찍고 흘러내리며 소멸하는 생의 모래시계에서 흘러내리는 모래들이 사력을 다해 끝없이 속삭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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