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드 크로키(1)

손끝 잊힌 기억

by 염미정



[1지망 : 만화가]

[2지망: 만화가]

[3지망: 만화가]


중학생 때까지 내 장래희망은 언제나 만화가였다.

학급마다 한 명씩 있는,

뒷자리에 앉아 만화책을 보며 때때로 연필질을 하는

그런 학생이 바로 나였다.

미술 시간에 친구들은 내 포스터를 구경하러 오고,

사생대회를 나가면 웬만해선 수상을 놓치지 않았으니

그림 실력은 꽤 변변했다고 말할 수 있겠다.


아주 천재적이라 할 수는 없지만

반에서 1등 정도 되는 고만한 실력.

교과서엔 낙서가 없는 페이지가 없을 만큼

산만한 정신머리였지만

그래도 그림을 그릴 때만큼은

조금의 지루함도 느끼지 못한 채 몰입해

시간이 갑자기 흘러버린

신기한 경험을 했던 기억도 난다.


만화책 읽기와 그림 그리기가

갑갑한 가정으로부터의 유일한 탈출구였던

그 학생의 장래희망이 저리도 일관된 것은

정말이지 당연한 일이었다.




문제는 고등학교 입학을 앞둔 시점 생겼다.


내가 살던 동네는 지방 광역시였지만

그래도 부모의 오케이 사인을 받은 학생들은

사립 예술 고등학교에 입학하기도 했는데

예나 지금이나 어른들은 예술을 배곯는 일로 보았기에

나의 어머니는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내 간청을 거절했다.


당시 고등학교 기간제 교사로 근무하던 내 어머니는

아마 평생을 따라다닐

나의 생활기록부 기록을 탐탁지 않아 했는데

그 이유는 내가 인문계 고등학교에 입학하게 되었을 때

담임교사가 생활기록부에 ‘잘못 적힌’ 장래희망을 보고

지도 방향을 잘못 잡으면 어쩌나 하는

염려에 있었던 것이다.


며칠 뒤 어머니께서 학교에 오셔서

담임 선생님과 면담을 하고 돌아가신 일이 있었다.

그 후, 담임 선생님은

조금 걱정스러운 얼굴로 나를 부르셨는데

어머니께서 내 생활기록부에 있는 장래희망을

‘선생님’으로 바꿔달라는 요청을 해오셨고

그리하여 당신이 그렇게 하셨다는 말씀을 하셨다.


방과 후 충격과 상처로 얼룩진 마음으로

그 연유를 여쭤보았을 때

나에게 돌아온 이 말이 가슴에 세게 박혔다.


“너만큼 그리는 애는 널리고 널렸어.”




사실 몰랐던 건 아니었다.

옆옆 반 어떤 여자애가

나보다 실력이 더 낫다는 눈치는 이미 채고 있었고

재능보다는 흥미에 가까운 나의 끄적거림이

얼마나 간절한지에 대한 의심을

나 역시 하지 않았던 바도 아니었다.

그러기에 어머니의 그런 반응에 대한 내 태도는

저항이 아닌 수용으로-

그렇게 나는 그림 그리는 일에 점점 흥미를 잃어갔다.




시간이 흘러 배곯지 않는 성인이 되어

나는 예술과는 영 인연이 없는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이따금 그림에 대한 갈증을 느낄 때도

오랜 시간 굳어버린 손은

내가 생각하는 대로 움직여 줄 생각이 없어보였고

어디까지나 그림은 작은 관심에만 그쳐가고 있었다.


“누드모델 구인 - 시급 2만 5천 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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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 목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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