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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자신감 Oct 16. 2024

푸치파 똠얌수프

치앙마이 옆 치앙라이_음식 편 (#15)


푸치파는 태국에서 해돋이와 해넘이로 유명한 지역으로 정상에 우뚝 솟은 봉우리가 이곳의 상징이다. 산이 귀한 태국에서 산은 신성하다. 한국의 명산 지리산(고도 약 1,916m) 보다 낮은 푸치파(고도 약 1,628m)가 치앙라이에서 가장 높은 봉우리 중 한 곳이라 하니 왠지 출발 전부터 심심하다. 그러나 태국에서 라오스로 국경 없이 흘러가는 메콩강, 국경없이 이어지는 산등선, 그 사이로 경계없이 떠오르는 위대한 일출. 사람에 의한 국경은 있지만, 자연에 의한 국경은 보이지 않는 사진 한 장이 그 곳으로 이끌기 충분했다.

푸치파의 능선 풍경


오후 1시, 치앙라이 도심에서 푸치파로 향한다. 서쪽에서 동쪽으로 가로지르는 국도 길, 넓은 평야가 눈에 들어온다. 유독 파란 하늘과 노랗게 익은 벼가 모래사막처럼 황량하다. 몇 시간을 달렸을까. 조금 전만 해도 해가 길었지만 어느새 그림자가 길어진다. 키 낮은 관목들이 제법 키 높은 교목들로 바뀌며 하늘을 가리더니 길도 급격히 좁고 가팔라진다.


오후 4시, 도심에서는 지지 않을 태양이지만 푸치파는 호기로운 태양의 욕망을 식히려는 듯 우뚝 솟은 능선을 발갛게 물들인다. 오후 5시, 미리 예약한 푸치파 숙소에 도착하니 어둑어둑해진 하늘보다 오후 반나절 만에 변심한 냉랭한 공기가 놀랍다. 푸치파의 숙소는 발아래 전망을 두고 여러 채의 작은 오두막을 지어 놓았다. 허름한 숙소 안은 에어컨이 없어도 느껴지는 서늘함에 낯설다.


땀으로 젖어 있던 등판에 살짝 닭살이 오를 때쯤, 숙소에서 준비한 저녁식사가 차려졌다. 대형마트나 편의점이 없는 푸치파, 산에서 나고 자란 식재료로 계란 오믈렛, 양배추 볶음, 닭고기로 만든 똠얌수프, 치앙라이산 재스민 라이스로 푸짐하다. 따뜻함이 느껴지는 음식, 특히 똠얌은 더없이 반갑다.

푸치파의 똠얌수프


무더운 길거리 매연 옆에서 땀 흘리며 먹던 똠얌보다 산아래 싸늘한 공기 옆에서 먹는 똠얌이 진미요, 5성급 호텔 레스토랑에서 먹는 똠얌꿍(새우) 보다 허름한 산장에서 먹는 똠얌까이(닭고기)가 진국이다. 자연은 인간의 오감을 변화시킬 만큼 우월하다는 것을 다시금 깨닫게 한다.


숙소는 푸치파 일출을 보기 위해 도시에서 온 태국사람들로 모처럼 붐빈다. 인터넷과 TV도 없는 산속, 새벽 산행을 위해 셔틀차량을 예약하고 이른 잠을 청한다. 자정을 한참 넘은 시간, 오두막 벽체 구멍사이로 푸치파가 찬바람으로 휘파람을 불기 시작했다. 침낭을 귀 끝까지 올려 참을 청해 보지만 소리만으로도 이미 냉골 같은 방 안의 분위기를 얼려버릴 듯하다.


새벽 4시, 약속했던 썽태우(트럭버스)를 탑승하고 어두운 산길을 헤치며 올라간다. 간밤 바람과 추위로 잠을 설쳐 정신은 혼미한데 몸은 물속 같은 안개비로 다 젖어버렸다. 푸치파 주차장에서 내려 정상까지 산행을 해야 했다. 안개는 안경은 가리고 어둠은 눈을 가리니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다. 암흑 속에 숨은 낭떠러지, 땅밑에 숨은 칼바위, 풀숲에 숨은 똬리를 튼 독사. 절박함 속에 홀로 오도 가도 못해 멈춰 섰다. 이것이 고립인 것일까.


낯선 이국땅에서 비명횡사하는 것은 딱히 명예롭지도 않다. 때마침 까마득한 곳에서 희미한 소리가 들려온다. 풀피리처럼 가얄프고 애처롭다. 이내 내 옆을 지나 정상으로 향한다. 마술피리에 홀린 듯 요상한 소리를 뒤쫓아갔다. 간밤의 휘파람 소리는 푸치파의 성난 목소리였을까? 신비로운 운무를 바람이 뒤섞어 비구름을 만들니 몸 구석구석을 휘감는다. 무더운 산아래에서 지내다 보니 추위를 잃어버렸는지 기온이 영하가 아닌데도 사지가 떨린다.

푸치파의 아침


새벽 6시, 동은 트는데 해는 보이지 않는다. 대신 어둠 속에서 동행해 준 고마운 이웃들이 눈에 들어온다. 맨발의 승려부터, 지팡이 짚은 등 굽은 할머니, 요상한 피리소리의 악기를 연주하며 동냥하는 소년. 이들 덕분에 어둠 속 낭떠러지와 미끄러운 진흙, 날카롭고 울퉁불퉁한 바위를 피할 수 있었다.


푸치파는 전날 완벽한 똠얌수프를 대접했지만, 기대했던 사진 속 웅장한 일출은 허락하지 않았다. 성공적인 여행은 비록 원하는 결과를 얻지 못하더라도 과정에 만족하고, 출발한 곳으로 무사히 되돌아왔을 때 비로소 마무리된다는 가르침을 말없이 알려주고 있다.



태국 북부의 홍수피해가 심각합니다. 특히 치앙라이의 대규모 침수로 평화로운 일상이 어려운 상황입니다. 예전 아름다운 모습으로 어서 빨리 복구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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