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네치아의 겨울이 생각나는 건

by 임기헌

아침 햇살도 이젠 차지가 않다. 여름이 왔나보다. 어느새 5월도 꽃비를 내리며 고개를 내민다. 빠르다. 지나간 봄에서는 갈등과 반목, 시기와 증오 같은 단어들이 새초롬하게 떠오른다. 현재진행형이기도 하다.


밤12시가 훌쩍 넘은 지금.

잠이 오질 않아 동네 산책을 하고, 얼음을 가득넣은 커피를 한잔 마셨다. 여름에는 혼자 어디 여행을 다녀올까 싶어 세계지도를 펴놓고 곰곰히 묵상을 해봤다. 주말께 읽었던 파시스트가 민주주의를 점령하게 된 역사서도 그와중에 꽤나 흥미로운 걸.


널브러진 옷가지와 쇼파 아래에 숨어있던 리모컨, 밀린 설거지를 보며 반복되는 하루하루에 권태가 느껴지기도 한다.


그야말로 매일매일 똑같은 하루.


사람들 모습에서 웃음끼를 굽어 본 지가 오래다. 웃고 있어도 슬퍼보인다. 그리고 지쳐보인다. 잘 알 수 있다. 저마다 다채로운 일상을 과시하려 발버둥을 치지만 한 철에 지나지 않음을 금세 느낄 수도 있다.


어떤 하루를 복기해보더라도 매한가지다. 더 나은 내일을 바라지만 대부분의 희망은 구운몽이란 사실도 잘 알 수 있다.


술의 힘을 빌린 억지스러운 하루의 즐거움은 다음 날을 멍들게 한다. 매스껍고 공허하다. ‘자니?’ 하며 누군가에게 건넨 메세지와 통화 내용은 기억조차 나질 않는다. 분노에 차서 SNS에 늘여놓은 글귀는 공분을 사기도 한다.


그 해 여름. 나는 이런 기분을 안고 베네치아로 날아가 여러 곳을 걸었다. 고영민 시인께서 노래한 <여름의 일>을 탐닉하며 걸었다.


나무 아래 앉아 울음을 퍼 담았지/ 시퍼렇게 질린 매미 울음을/ 몸에 담고 또 담았지/ 이렇게 모아두어야/ 한철 요긴하게 울음을 꺼내 쓰지/ 어제는 안부가 닿지 않은 그대 생각에/ 한밤중 일어나 앉아/ 숨죽여 울었지/ 앞으로 울 일이 어디 하나, 둘일까/ 꾹꾹 울음을 눌러 담았지/ 아껴 울어야지/ 울어야 할 때는 일껏 섧게/ 오래 울어야지


아날로그, 디지털 시대를 넘어 AI시대까지 경험할 수 있는 삶이라니, 참 행운이었다. 모든 시대에 함께한 여름도, 나에겐 특별한 기억으로 남는다. 겨울에 다시찾은 베네치아도 빼놓을 수 없겠다.


서툰 나는 결국 모두 실패하며 견디질 못했지만, 시절의 아름다움은 기억할 수 있겠다. 그 시절은 또 지나간다.


이제 남은 건 병과 죽음, 이별과 슬픔 뿐이다. 그 옛날 황진이의 슬픈 사타구니를 보는 듯한 애틋함이다.


이승에서의 마지막 날에 나는 뭘 할까. 중환자실에서 짜장면에 몰래 소주한잔을 곁들여 마시고, 누군가에게 보내는 ‘자니?’ 하는 문자가 마지막이 될까.


대답없는 그 문자는 그제에는 답이 올까. 베네치아에서의 겨울도 생각이 날 것만 같다.


사랑하는 사람들과 그리운 얼굴들을 하늘 가까이에 닿기전 다시한번만 볼 수 있다면 좋으련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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