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 친구들로부터

by 임기헌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 오늘. 엄마 친구들 계모임에 끼여서 같이 한잔.ㅎㅎ 어릴 때부터 봐온 어무이들이라 생경함도 없이 편하다. 애정어리게 봐주시고, 다시 눈 딱 감고 재혼하라며 여자도 소개해줄까, 하고 물어봐주시기도 한다. 혼자 있는 엄마 봐서라도 재혼하라며, 그게 결국 제일 큰 효도라고 한다.


맞다. 아무렴, 내가 어떻게 반박을 할 수 있을까. 어른들은 철부지인 나에게 이토록 맞는 말씀만 하시는 걸.


오묘한 생각이 든다. 82년생, 어느덧 내 나이 44살. MZ세대가 보기에는 완연한 늙다리 아저씨일테고, 앞선 세대가 봤을 때는 아직 젊다고 여기는 중간 세대에 걸쳐져 있지 않을까 싶다. 그래, 생물학적인 나이야 그렇다치자. 그럼 이제와서 내가 경쟁력이 있을까, 하는 우려가 든다. 내세울 게 하나도 없는데.


외모, 경제력, 지식, 성격... 뭐가 있을까.


요즘은 기본적으로 하룻밤에 100만원을 호가하는 시그니엘99층에서 반클리프 목걸이를 준비해서 프러포즈를 해야 된다며.


흠...


이즈음에서 내 이야기를 좀 해보고 싶다. 보통 남녀가 헤어질 때 그 이유를 성격차이로 많이 든다. 맞다. 형언할 수 없는 둘만의 성격차이가 주된 이유가 되기도 한다.


여기서 나는 구체적인 사례를 얘기해보고 싶다. 이런거다. 데이트를 하려 12시에 약속을 잡았다. 그런데 나의 경우에는 제 시간에 나온 여자친구를 본 적이 없다. 30분 혹은 1시간 정도는 정해진 룰 처럼 늦다. 그럼 나는 묻는다. 대체 왜 늦게 나오냐고. 그녀는 답한다.


"아니, 오빠가 너무 빨리 나오는거잖아. 여자는 화장도 해야 되고 할게 얼마나 많은데!!"

"응?? (그럼 약속시간을 애초에 1시간 늦추면 되는거 아닌가..?)"


또하나, 나는 여자친구가 남사친을 만나건 클럽을 가건 크게 관여하지 않는다. 그런데 새벽 3시가 넘도록 연락이 되질 않는다. 그리고 다음 날에는 모두가 똑같은 항변을 한다. 피곤해서 일찍 잤다고.


나는 믿어야 될까? 외간 남자랑 원나잇을 했을까, 정말 신데렐라처럼 12시에 딱맞춰 집에 들어가서 곱게 잤을까. 우리는 이미 답을 적확하게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어물쩍 넘어간다. 한번더 캐물었다간 의처증이며 스토커라고 되려 반격을 해대니 말이다.


지인의 SNS나 현장을 목격해 증거가 또렷한 적도 있는데, 나는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제 버릇 개 못주는거다.


이런 사례들이 켜켜이 축적이 되고 불혹즈음의 나이가 넘어가니 포기의 수순이 되더라는 얘기를 하고 싶었다. 섹시한 블랙핑크의 제니와 현모양처의 대명사 격인 신사임당이 혼합된 듯한 여성이 다가와도 이제는 몸서리를 치며 멀리하게 된다는 것이다. 고등학교 때 첫사랑과 사귄 이 후 25년간 여성들을 만나며 내린 결론이다. 오차범위 ±3.1%포인트, 신뢰도는 95% 정도 되지 않을까.


단 한번도 제 시간에 나타나질 않고 외도를 한 건 그대들인데, 나는 왜 항상 욕을 뒤집어 써야되며, 그대들은 어쩜 그렇게 당당할까. 이 뿐 일까. 한번의 결혼식과 이혼을 치르며 회사 퇴직금과 수년간 모은 적금을 모두 깨고 빚더미에 앉은 나는 도대체 뭘까.


그 언젠가 유명 언론사의 기자가 되니 또다시 연락을 해오고, 최근에 책을 두 권이나 냈더니 낼 때마다 또 슬며시 연락을 해오는 이들도 있다.


이즈음 되니 궁금해진다. 그녀들이랑 '창녀(娼女)'들은 뭐가 다른지. 그 옛날 기생 황진이는 의리라도 있었지. 우리는 어쩌다가 또 어물쩍 만나서 아무일 없듯 술한잔에 섹스를 나누면 되는건가? 너희 남편들 몰래? 나는 뭐 환영이니 생각나면 언제고 연락 하시라. 그리고 남편이 의심하면 나한테 그랬던 것 처럼 남편을 쥐잡듯이 잡으시라. 그 버릇 어디가랴.


어수선한 사회다. 계엄을 겪으며 사회 곳간마다 극우들이 이렇게나 많은지도 몰랐다. 그토록 감춰둔 폭력성과 집단의 무지성을 그동안 어떻게 참은건지 의아할 정도다. 한국전쟁에 이은 보릿고개 시절을 겪은 장년층들이야 그들의 핍진성, 그러니까 양극으로 쪼개진 이념을 이해 못 할 바는 아니지만, 극우화 된 요즘의 청년들을 보면 나는 할 말을 잃게 된다. 토론을 좋아하지만 그들 앞에서 조자룡이 헌 칼을 휘두르듯 설레발을 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저급하게 행동하는 것을 훈장처럼 여기는 문화는 또 웬말인가.


거짓과 속임수로 가득찬 세상 속에서, 나는 어디로 갈지 몰라 여름 내내 머뭇거린지도 모르겠다.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 수 있었으니, 나의 여름은 그걸로 된건지도.


침묵이 있는 곳엔 언제나 따뜻한 바람이 불어 온다는 걸, 다가오는 가을에도 믿어 의심치 않을 뿐이다.


시나브로 오늘 많은 이야기를 나눈 엄마 친구분들께 못다한 답이 됐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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