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갈빵처럼 휑한 마음을 달랠 곳 없어 퇴근길 작은 사찰에 들려 절을 하고 스님께 멋쩍은 인사를 건넸다. 이 후 도망치듯 나와 불 밝힌 다이소에도 잠시 들렸다. 번뜩이는 아이디어가 투영된 여러 상품들이 눈길을 사로 잡는다.
다음으로 찾은 곳은 내가 졸업한 중학교. 30년의 세월이 무성하게도 여러 흔적들이 찻잎 내려앉듯 마음에 가라 앉는다. 흙더미로 가득한 운동장에서 햇빛 쨍쨍한 여름날 친구들과 축구를 하고 야외 수돗가에서 서로 등목을 해주며 물장구를 치던 광경이 저만치에 보인다.
곱게 깔린 인조잔디와 새건물들이 우리의 기억을 덮으려 애쓰지만, 그럴수록 그날의 광경은 더욱더 생경하게 다가오는 것만 같다.
‘삐삐’로 마음을 전하던 그 시절. ‘486’이 찍히면 사랑한다는 뜻이랬지? 이젠 너무 늦은걸까. 수줍은 마음에 그때 못한 답장을 다시 할 수 있다면, “나도 사랑해”라고 외치고 싶다.
과거 현직에 있을 때 취재차 한국은행 금통위원장님을 뵌 적이 있다. 우리나라 시중 기준금리를 결정하는 위원회의 최종결정권자셨는데, 차를 마시며 이런 이야기를 하시는 거였다.
본인은 집에가면 너무 공허하다고. 나는 대뜸 되물었다. ”위원장님은 세계 곳곳에서 모시려는 분들도 많으시고, 우리나라 금융•경제 권력을 다 쥐고 계신데, 하나도 안외로우실 것 같으세요.“라고.
근데 아니란다. 퇴근하고 집에 가면 잠이 안올 땐 혼자 소주한잔 할 때도 있고, 이제 늙어서 어디서 불러주는데도 없단다.
그때 내 나이가 서른즈음이었지 싶다. 나는 전혀 몰랐다. 무슨 의미인지. 세상이 이토록 즐거운데, 나는 사랑하는 여자친구도 있는데, 그래서인지 그 의미를 알려고 하지도 않았다. 나와는 다른 세상이었으니까.
그런데 지금, 그 다른 세상에 나는 거주를 하게 됐고, 지독한 공허함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 여행, 공부, 운동, 연애, 독서, 비행 따위들. 아무 생각이 들지 않도록 열심히 해보지만 무얼해도 매한가지다. 친구들과 어울려 즐겁게 술을 마셔도, 유혈이 낭자한 스릴 넘치는 영화를 봐도, 바다 밑을 탐험하고 태양계를 탐구하며 처음 가보는 나라의 사람들과 대화를 하고 그들의 문화를 탐닉해 본 들, 아무런 감흥이 없다. 장례식장을 가도 슬프지 않고, 결혼식장에선 기쁘지도 않은거다.
그런데 수평선 너머의 사람들은 뭐가 그렇게 좋은걸까. 나 혼자만 이토록 다른 세상으로 건너와 버린걸까.
참 많은 꿈이 있었는데, 점점 시들어가는 걸 또렷하게 느낄 수 있어 슬프다.
……
어디선가 삐삐가 울리고 ‘1126611’이라는 숫자가 뜬다. 의미를 곰곰히 생각해본다. 나열된 숫자 정가운데 가로획을 쭉 그어본다. 그제야 ‘사랑해’라는 글자가 보인다.
이런 낭만이면 괜찮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