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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대영 Jun 10. 2024

첫 술에 배부를 수 없지

지난겨울에 가족들과 발리로 여행을 다녀왔다. 

처음 간 클럽매드 리조트는 신세계였다. '모든 것이 리조트 안에서 해결된다'는 컨셉 아래,  아침부터 자정이 될 때까지 먹을거리, 놀거리가 계속 제공되었다. 

간단한 스포츠도 즐길 수 있었는데 나는 여기서 처음 제대로 된 양궁을 해봤다.

올림픽 경기처럼 수십 미터의 거리가 아니어서 나름 쉬어 보였다. 하지만 5미터도 안 되는 거리의 과녁에 화살을 넣는 것은 생각보다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전의 횟수가 늘어날수록 점점 과녁 안으로 들어오는 화살들이 늘어났다. 

방법은 간단했다. 정중앙을 비켜가는 화살이 어디로 날아가는지 파악한 뒤, 조금씩 화실의 방향을 조절했다. 팔은 아파오긴 했지만 십 수번의 도전부터 화살은 계속 10점에 가까운 곳에 박혔다.




경쟁 PT를 수주하면 짧게는 하루, 길면 이틀 정도 기쁨의 시간이 지속된다. 

이 시간이 끝나면 실행의 영역으로 들어가는 현실적 고난이 시작된다. 

최종 광고물을 컨펌받고 실제 온에어하기 위해선 많은 난관이 도사린다. 

보고의 과정은 대부분 험난하다. 한 번에 끝나는 시안 보고는 거의 없다고 보면 된다. 

나를 비롯한 많은 동료들이 보고를 통해 우리의 생각을 팔지 못하는 것에 스트레스를 받는다. 

보고 과정에서 험한 말이 등장하기도 하고 말도 안 되는 수정 방향이 제시되는 일이 다반사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과정은 어쩔 수 없는, 과녁에 화살을 맞히기 위한 필수 과정이다. 

그러니 한, 두 번의 보고 과정에서 클라이언트로부터 욕을 먹는다고 너무 실망할 필요 없다.  


권투에는 잽이라는 기술이 있다. 복싱할 때 가장 먼저 배우는 펀치다. 팔만 움직여서 가볍게 친다. 거리를 재거나 견제하거나 상대의 공격 타이밍을 무너뜨리는 게 목적이다. 

광고에서도 잽은 필요하다. 결정타를 날리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기술이다. 첫 한 방에 모든 힘을 실어 결정타를 날리겠다는 욕심은 버려야 한다. 


시안보고 과정을 단축시키기 위해서는 의사 결정자에게 결정타를 날리기 전, 그가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잽을 날려야만 한다. 의사 결정자의 마음을 비켜가는 전략과 크리에이티브의 화살이 어느 방향으로 가는지 가늠해야 한다. 

그래서 보고 과정이 중요하다. 

그렇다면 명중률을 높이고 명중으로 가는 시간을 단축시키는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


첫 번 째, 가능한 보고 과정은 의사결정자와의 직접 대면이 좋다. 

클라이언트 실무자들은 자신들의 보고 과정을 거친 최종 결과물을 의사 결정자에게 보고하길 원한다. 하지만 문제는 실무자들의 최종 의사결정자의 마음을 읽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이다. 따라서 가능하다면 실무자 보고를 줄이고 최종 의사결정자의 직접 보고로 향하는 것이 좋다. 


두 번째, 첫 보고에서 가능하면 다양한 방향성을 보여주는 것이 좋다. 

자신 없이 보일 수 있지만 가능하다면 첫 보고에서는 완벽하다고 생각하는 2개의 방향을 정리하기보다 완벽하지 않더라도 각기 다른 방향에서 4개의 광고를 보여주는 게 좋다.

다양한 방향성을 통해 의사 결정자가 원하는 것에 대한 결정적 힌트를 얻는다면 베스트다. 

하지만 모든 방향이 마음에 들지 않을 수도 있고 진탕 욕을 먹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래도 괜찮다. 때리기 위해 접근하면 맞는 경우도 생긴다. 

중요한 것은 욕을 먹고 잘 소화시키는 일이다. 

욕의 영양분만 흡수하고 나머지는 배설해 버리도록 노력하는 게 좋다. 

흡수할 영양분은 의사결정자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작은 힌트라도 얻는 것이다. 


처음부터 결정타를 날리겠다고 전력을 다했는데 좋은 피드백을 받지 못하면 정비례한 만큼 힘이 빠진다. 따라서 처음에는 가벼운 마음, 욕먹을 마음으로 접근하는 게 낫다. 방향에 대한 힌트를 얻었다면 그다음은 전력을 다해 원하는 결과물을 보여줄 수 있도록 승부수를 던져야 한다. 


말이 쉽지, 클라이언트에 따라서는 우리가 결정타라고 생각한 여러 보고에도 쓰러지지 않는 괴물이 있다. 

하지만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다. 언젠가는, 어떤 이유로든 결국 쓰러지게 돼있다. 



펜타클은 비딩 과정에서 제안한 광고가 대부분 그대로 시행된 경우가 많은 편이다. 

그래서 회사 동료들은 그것이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많은 경우 PT는 PT일 뿐, 실행을 위해 또 다른 시안을 만들어야 하는 경우가 더 많고 당연한 일이다.  

보고 과정의 난항을 겪으며 힘겨워하는 동료들이 안쓰럽기도 하지만 그와 별계로 한 기업 안에서 직급별로 여러 의사결정자들의 입맛에 맞는 광고를 팔아야 하는 것이 광고 업의 숙명이기도 하다. 

그 과정 속에서 모두 덜 지치고 우리의 생각과 크리에이티브를 잘 팔아 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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