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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대영 Jul 01. 2024

광고주에게 필요한 능력

4년만 더 지나면 20년이 되는 아주 오래전 이야기다.

전 직장에서 광고주로 근무하며 진행했던 캠페인이 있다. '오주상사'라는 캠페인이었다.

스마트폰이 상용화되기 전, 폰으로 인터넷이 가능한 OZ라는 서비스를 알리기 위한 캠페인이었다.

이 캠페인에는 배우 장미희, 오달수, 유해진 등이 등장한다. 오주상사 영업 2팀에서 벌어지는 에피소드를 담아 8화에 걸쳐 CF 시트콤이라는 형식으로 온에어되었다.



16년 전인 당시, 시트콤 형식을 차용하며 제작 발표회까지 진행했던 나름 BIG 캠페인이었다.

이 광고는 HSAD에서 담당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 큰 프로젝트의 아이디어와 실행을 진행한 대행사의 모든 동료들이 참 많이 고생을 했겠다는 생각이 든다.

많은 시간이 지났고 그때의 동료들이 이 글을 볼지 모르겠으나 기억에 남을 좋은 캠페인을 만들어준 대행사 동료들에게 고마움을 전한다.


하지만 8회에 걸쳐 진행된 장기 캠페인이었으니 일에 순탄함만 있었던 건 아니다.

시도해보지 않은 형식에 여러 반대도 있었고 광고가 늘 그렇듯 효과성의 문제 지적도 많았다.

그중 특히 6화의 대리인생 편은 온에어 되지 못할 뻔 한 사연을 갖고 있다. 그 사연은 이랬다.


당시 HSAD의 CCO까지 나서서 커뮤니케이션담당 상무에게 시안을 보고 했다. 하지만 반응이 시원치 않았다. 그때까지 나온 광고 시리즈 중 6화의 아이디어가 제일 마음에 들었던 나는 꼭 안을 팔고 싶었다.

2008년은 금융위기가 있었고 실제 사람들의 삶이 팍팍했다. 광고에서 조금이나마 희망적인 이야기를 들려주고 싶다는 개인적 바람이 있기도 했다. 만년 꼴찌 통신사의 브랜드 선호도를 높일 수도 있다는 기대도 있었다.

하지만 담당 임원은 내용 자체를 공감할 수 없다고 했다. 회사를 다니면서 밤에 대리 운전을 하는 사람이 얼마나 되며 또 아는 사람을 만나는 확률이 있겠냐는 게 이유였다. 회의 자리에서의 설득은 실패했고 대행사가 공 들여 준비한 안은 사장될 위기에 있었다.


뭐라도 해야 했다. 좋은 아이디어를 날리고 싶지 않았다. 그날 야근을 하며 DAUM의 대리운전 카페에 들어갔다. 다행히 대리운전을 하다가 지인을 만나 난감했다는 사연들이 적지 않았다. 사연들을 모으니 꽤 두툼한 보고서가 만들어졌다. 밤늦게 까지 만든 보고서를 담당 임원의 책상 위에 올려놓고 퇴근을 했다.

다음 날 아침, 보고서 뭉치를 내 책상 위에 툭 던지며 담당 임원이 한 마디를 하고 지나갔다.

'그렇게 하고 싶으면 해라.. 해'




광고주와 캠페인을 준비하면서 가장 힘든 일 중 하나는 몇 달에 걸친 제안이 C레벨 보고 한 번으로 날아갈 때다. 경험한 많은 광고주는 C레벨 보고에서 담당 임원에게 말 한마디 제대로 못하며 광고 안을 팔지 못했다.


광고주에서 대행사로 이직한 나의 커리어와 반대로 광고대행사에서 근무하는 적지 않은 사람들이 광고주로의 이직을 원한다.

광고주가 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광고주가 되면 어떤 것을 해야 하는 것일까?

후배들은 그런 고민을 하고 있을까? 그저 을에서 갑이 된다는, 드디어 광고대행사를 탈출한다는 생각만 하는 건 아닐까?


나의 미천한 경험을 통해 보자면, 광고주가 해야 하는 가장 큰 일은 의사 결정자인 C레벨의 마음을 읽는 일이다. 많은 광고주들이 광고의 방향성이라며 이런저런 디렉션을 준다. 대행사는 실무자의 디렉션에 맞는 광고를 만들지만 결국 보고 단계에서 C레벨의 한 마디에 모든 크리에이티브가 물거품이 되는 걸 많이 보았다.


광고주가 광고대행사와 다른 점은 의사 결정자에 대해 조금 더 알 수 있다는 점이다. 의사 결정자는 지금 어떤 생각을 갖고 있는지, 광고를 통해 어떤 메시지를 고객에게 전하고 싶은 것인지, 어떤 톤 앤 매너의 광고를 좋아하는지,  광고 담당자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C레벨의 생각을 알아내야 한다.


그 생각을 반영해 대행사와 함께 만든 결과물은 어떤 방법으로든 의사 결정자를 설득해 팔아야 한다. 기업 광고 실무자의 궁극적 존재 이유는 광고대행사의 크리에이티브를 의사 결정자에게 팔아 내는 일이다.


Best 케이스는 의사 결정자의 생각을 담은 명확한 디렉션을 통해 결국 마음에 드는 안을 받고, 그것을 단독으로 팔아 내는 광고주다. 이렇게 되면 의사 결정자와 광고대행사로 모두에게 인정받게 된다.

Wost 케이스는 의사 결정자의 생각을 읽지 못한 채 자신의 생각으로 오랜 시간 수정과 수정을 거듭하다 결국 최종 보고에서 광고를 팔지 못하는 광고실무자다. 광고대행사는 물론 의사 결정자로부터도 좋은 점수를 받지 못한다.  




광고주로 보낸 지난 시절을 돌아보면 나는 의사결정자들에게 당돌하고 버릇없는 직원이었다. CEO 광고 보고가 끝났음에도 이해되지 않는 것이 있어 나가려는 CEO를 잡고 질문 세례를 퍼부었던 적이 있다. 몇 달 후 회식 자리 다른 테이블에서 그날 참석한 고위 임원 중 한 명을 만난 적이 있다. '어.... 회장님한테 대들었던 용감한 그 팀장이구나?' 라며 그는 비꼬는 말투로 인사를 받아주었다. 한 번은 꽤 많은 비용이 들어가는 프로모션 아이디어에 결재를 해주지 않는 임원에게 실행을 허가해주지 않으면 그냥 회사를 나가겠다고 협박한 적도 있었다. 오랜 시간이 지났으니 꿀 먹은 벙어리처럼 말 한마디 못해 광고를 팔지 못한 과거는 삭제되었을 확률도 있다. 그래도 광고대행사가 가져온 광고를 팔기 위해 노력을 했던 기억이 조금은 남아 있다.




대부분 광고 실무자들은 의사 결정자에게 미운털이 박히면 안 되는 직장인이다. 그 점을 잘 안다. 그래서 나처럼 당돌하고 버릇없는 직원이 되어서도 안된다. 하지만 기업의 광고 실무자로서 일하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가져야 하는지 한 번쯤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그 의미에 대한 나의 결론은 이렇다.

-고객의 생각을 읽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의사 결정자의 생각을 읽는 것이다.

-대행사에게 디렉션을 주는 방향은 나의 생각 보다 의사 결정자의 생각을 담아야 한다.

-대행사에게 일을 시키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대행사의 결과물을 의사 결정자에게 파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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