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우울증 환자의 회고
머리를 자르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해가지는 낯선 동네에서 커다란 무지개를 만났다. 그 무지개가 꽤나 아름답고 반가워서 사진을 찍어 친구들에게 보냈다.
어느 날 지는 해를 보며 아름답다고 생각할 수 있으면 좋겠다던 선생님의 말을 떠올렸다. ‘아, 정말로 감기가 낫고 있구나’는 생각이 드는 여름 저녁이었다.
처음 병원에 간 지 7개월이 지났다. 그때쯤 나는 5시에 일어나 공복 유산소 운동을 하고 이틀은 퇴근 후 수영을 다녔고 하루는 필라테스를 했으며 자격증 준비로 인강을 듣는 일명 <직장인 생태계 교란종>으로 살고 있었다. 매일 몸이 바스러지기 직전까지 움직였던 이유는 마음이 복잡할 때는 몸이 바쁘면 된다고 들었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마음의 감기 기운은 떨쳐지지 않아 길거리를 걷다가, 모니터를 보다가 모든 것을 다 그만두고 울고 싶었다. (실제로 길바닥에서 운 경험 많음) 그리하여 스스로 기어코 병원을 찾았다. 해결해야 할 문제의 원인을 도저히 알 수 없고 발버둥 쳐도 빠져나올 수 없음을 인정했다. ‘노오력’으로도 안 되는 일이 있다. 나는 감정에 휩싸여 감기에 걸린 나약한 인간이었다.
“열심히 살지 않아도 괜찮아요”
“노력하지 마세요”
처음 병원에 갔던 날 들은 이야기였다.
병원을 나오고 집에 와서 잠들기 전까지, 곱씹고 곱씹다가 엉엉 울었다. 가장 듣고 싶은 이야기였다. 다 그렇게 산다거나 노력해서 이겨내야 된다거나 힘내라는 얘기가 아닌.
그냥 살아가는 것이라는 말이 맞다. 대단한 운명을 지고 사는 것도 아냐 그냥 나 하나만 건사하면 되는 거야. 그냥 하고 안되면 다시 하고 또 안되면 포기하기도 하면서. 오늘 못한 일은 내일 마 저하기도 하고. 나는 내가 짓는 나의 집이며 망가지고 부족한 곳이 있으면 하자보수하면 그만이다. 그 책임은 시효 없이 이어진다.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공들여 지은 나의 집은 모래성이 아니다. 오늘 하루 만족스럽지 못했다 하더라도 와르르 무너지지 않는다. 반대로 하루아침에 모든 걸 “짜잔” 하고 바꿔 끼울 순 없지만. 차근히 고쳐나가고 꾸며나가자, 소중한 나의 집을 아늑하고 평온하게 만드는 일을 게을리하지 말자.
적당히 도망치자. 도망쳐 비빌 언덕을 찾는 데에 최선을 다하자. 술 마시며 LP 틀 수 있는 내 방 같은 당장에 만날 수 있는 비빌 언덕이라면 더 좋다.
대충 열심히, 적당히 비겁하게, 최대한 행복하게 살자. 그리하여 가끔은 무슨 일이 없어도 씩씩하게 걷고 흥얼대며 지내자.
여전히 출근하기 싫고 삶은 지루하지만 요즘은 가끔 어쩐지 신이 나고 기분이 좋다. 오늘은 아니지만 엊그제는 그랬다. 이렇게 무사한 하루가 쌓이며 감기가 낫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