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의 시작, 홍천에서

by 돌아온 돌보


어렸을 적, 엄마는 그랬다. '처서'가 지나야 여름이 다 간 거라고.


정말 그랬다.

매년 처서가 되면 여름이 언제 그랬냐는 듯 멀찌감치 물러나고 어김없이 가을이 다가오는 것이었다.


어디선가 불어오는 선명한 바람에 콧잔등이 시려온다. 가을볕의 강렬한 기운에 눈뜰 기세 없이 현기증이 몰려온다. 훅 들어오는 차가운 기운에 양팔로 가슴팍을 여미며 눈을 감고 느껴본다. 뜨거운 햇빛에 이따금씩 눈두덩이가 뜨겁게 아려오고, 만지작 거리던 핸드폰 화면의 반사광이 눈동자를 쏘아댄다.


그렇게 무심코 왔나 보다, 가을이.


여름의 끝자락을 꽉 붙잡고 그리도 놓아주기가 싫었는데, 무방비로 노출된 날 것 그대로의 자연. 일렁이는 밀물과 썰물로 만조와 간조가 번갈아 찾아오듯, 계절의 변화무쌍한 힘은 뜻대로 안 되는 섭리임을 절감하는 순간이었다.


가을 볕의 야생화


서둘러 떠났다. 홍천으로.



가는 길은 아니지만, 잠시 들른 원주 월송리에 자리한 '뮤지엄 산'.

일본의 유명 건축가 안도 타다오가 설계한 하나의 공간이 전체 예술작품으로 승화되는 우아미가 넘치는 곳. 입구부터 역시 남달랐다. 범상치 않은 아우라가 피어오르는 곳으로, 건물 초입부터 터져 나오는 탄성을 금하기 어려웠다. 아직은 초록의 기운이 물씬 풍기는 가을 산자락 아래, 모던한 건축미가 돋보이는 이곳은 자연과 일체 된 아름다움으로 우리에게 진정으로 자연과 어우러지는 건축물의 진수가 무엇인지 새삼 전달해주고 있었다.


뮤지엄 산의 한 장면


꽤 많은 사람들이 함께 감상에 젖었다. 잘 관리된 잔디밭 위에 몇 개의 현대적 전시 작품들이 눈길을 끌었다. 건물 안은 두 방향으로 나뉘어져있다. 판화공방과 종이 박물관.


파피루스와 종이박물관의 한 테마


아름다움으로 옹골진 여운의 잔상을 남겨준 뮤지엄 산. 자연과 건축물이 하나로 완성되어 뿜어내는 미의 소나타. 그리고 그곳에서 내가 경험한 강렬한 아름다움의 충격. 풍요로운 미의 어우러짐에 어느새 동참하여 우리는 그것을 이루는 하나의 구성원이 되어 한 면을 당당히 차지하고 있었다.


건물 안에서 바라본 전경


드디어 홍천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햇볕이 어느새 여물어 고개를 아래로 떨구자 도착한 캠핑장에서 아직 열기를 토해내지 못한 뜨거운 잔디가 까슬까슬하게 발등을 간지럽히고 있었다. 수영복으로 갈아입은 아이들을 데리고 캠핑장 정중앙에 위치한 수영장에서 노을을 맞이하였다. 까르르 웃는 아이들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자 하니 행복은 멀리 있지 않음을 너무나 당연히 느낄 수 있었다.


아이들을 낳고 나서는 단둘의 호캉스보다 시끌벅적한 캠핑장이 정겹고 몹시도 좋다.

아직 아이들이 어려서 손이 많이 가 힘든 수준이 대단하지만, 그럼에도 또다시 다음을 기약하게 될 정도로 너무나도 즐겁다.


텐트를 펼치고 엄청난 장비로 꾸며보는 캠핑장에서의 추억은 아니지만.

강가를 따라 펼쳐진 나무 데크 위에서 캠핑의자를 펼쳐놓고 숯불로 온 화력을 다해 구워 먹는 토마호크는 별미 중의 별미이다. 콸콸 목구멍을 관통하는 한밤의 맥주, 그 청량함으로 온몸은 전율이 흐른다. 해맑게 웃는 아이들에게 마시멜로를 꼬치에 꽂아 손에 쥐어준다. 졸졸 흐르는 강변의 물소리에 즐거운 귓가. 그 위로 피어나는 우리 가족의 소박하지만 큰 행복. 뿌리치듯 떠나는 여름의 손끝을 그만 놓아주려 한다.


숯불에 구워먹는 토마호크는 여행 중 별미다


어느새 밤은 깊어가고.

컴컴한 글램핑 장 안, 배를 시원히 까뒤집고 단잠에 빠져든 아이 둘을 지긋이 쳐다보며 종이컵에 나란히 따라놓은 와인을 '짠'하며 가볍게 부딪혀본다.

소리도 없는 적막한 기운의 시골 깊은 숲 속의 밤. 아직은 여름 풀벌레가 그 끝이 아쉽다는 듯 목놓아 노래를 부르는 연둣빛 기운이 무성한 곳에서 우리는 또 하나의 추억을 아로새긴다.

겨울의 시작을 알리는 가을.

여름과 겨울 사이 과도기라고도 할 수 있지만, 길가의 코스모스가 아름다리 한들거리고 구름 한 점 없는 하늘 아래 잠자리가 떼를 지어 비행하는 시원한 기운이 밑도는 계절, 그 앞에 우뚝 서서.


가는 여름에게 '안녕'하고 다정히 인사를 건네며 이번 홍천 여행을 마친다.


지금 이 순간도 찰나가 되어 오직 기억 속에서만 살아 움직이겠지. 하루가 남다르게 성장하는 아이들을 아쉬운 듯 매섭게 끌어안으며 여름의 추억이자 가을의 시작을 머릿속 깊이 단단히 봉인해 두었다 차가운 겨울이 나를 한없이 차지할 때쯤 하나씩 꺼내가며 찬찬히 음미해야겠다.


아쉽지만, 내년의 또 다른 멋진 가을 여행을 기약하며 홍천에서의 추억을 품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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