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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사가 문주원 Aug 02. 2022

루크의 눈



"딸이랑 많이 닮았네요."


? 현관문을 열고 나오다 주변을 돌아보았다. 나밖에 없는데?  


"어... 저는... 딸이 없어요."


인자하게 웃으시던 이웃집 할아버지가 심각한 표정으로 내 얼굴을 살펴보시더니 웃음을 터트리셨다.


"? 학생이네? 난 또..."


전 주에, 옆집에 이사 온 나를 학생이라 부르셨던 할아버지가 이번 주는 나를 그 '학생'의 어머니로 착각하신 것이다.



그러니까, 이게 다 옷 때문이다.


서른 살 무렵, 허리에 고무줄이 들어간 긴치마를 자주 입었는데, 동네 사람들은 나를 '어머니'나 '새댁'으로 불렀다. 청바지에 티셔츠를 입고 나가면 '학생'이라 불렸다. 대학원생 겸 프리랜서라 대낮에 외출을 자주 했기에 그랬지 싶다.


번은 독감 예방 주사를 맞으러 갔는데 의사 선생님이 나를 힐끗 보더니 문진표를 넘기며 작년에도 독감주사를 맞았냐고 물었고 난 아니라고 답했다.


"어머니, 어머니가 독감주사를 안 맞고도 독감에 안 걸렸던 건 어머니가 아주 운이 좋아서였던 거예요. 일 년에 독감으로 사망하는 환자가 몇 명이나 되는지 아세요? 어머니처럼 그렇게, 어?"


대본을 읊듯 잔소리를 하던 선생님은 나와 눈이 마주치자,


"그러니까 주사를 맞아야... 한다 이거야. 잘 왔어. 그래."


급히 잔소리를 마무리하셨다.


  


숏컷을 했다. 무스탕을 입고 워커를 신고, 눈 화장까지 하면 다른 사람 같았다. 석사 논문을 쓰던 시기라 환기되는 자극들이 필요했다. 더 나아가 탈색까지 하고 나니 운신이 편해졌다. 번화가를 나갈 때마다 "인상이 참 좋으세요"라며 허다하게 붙잡던 분들로부터 자유를 얻었다. 어쩌다 눈이 마주쳐도, 그분들은 속히 고개를 돌리고 나보다 인상이 더 좋은 사람을 찾아 가셨다.


많이 마른 몸 때문에 어린 시절부터 빤히 응시하거나 다 들리도록 귓속말을 하는 사람들을 종종 마주친다. 혹시 병이 있냐고 물어보는 사람들도 있었다. 하지만 '쎄 보이는' 스타일을 했을 땐 그런 시선과 간섭들이 확연히 줄어들었다. 처음 만난 이들 중에선 나를 무서운 언니 같다고 말하거나 다양한 직종으로 내 직업을 추측하기도 했다. 오랜만에 나간 모임에서 따로 인사를 하기 전까지 나를 알아보지 못한 경우도 있었다.


새댁, 어머니, 학생, 날라리, 무서운 언니. 한 계절이 지나기도 전에 들은 다양한 호칭들. 사람들은 나를 어떤 옷을 입고 어떤 머리를 하느냐로 판단하는구나, 새삼 느낀 계절이었다.


친구의 언니 가족이 여행을 간 동안 고양이, 루크와 깽이의 밥을 챙겨주러 간 어느 저녁. 낯을 가리는 겁 많은 애들이라, 역시 기척이 없었다. 이불속에 몸을 숨긴 것이 보였다. 화장실에서 '감자'를 캐고, 사료를 부어주고, 물그릇을 씻어 채우고 멀찌감치 떨어졌다. 깽이보다 용감한 루크가 방에서 먼저 나와 물을 마시고 내게 다가왔다. 가만히 나를 보다 캣타워 위로 올라와 눈높이를 맞추더니 자리에 앉아 눈을 느리게 깜빡였다. '내가 눈을 감는 이 순간, 당신이 나를 공격하지 않을 거라 믿어.' 고양이 눈키스였다. 나도 천천히 눈을 감았다 떴다. 루크도 응답하듯 다시 한번. 그렇게 눈맞춤을 몇 번 주고받은 뒤 루크는 내 다리에 등을 비비고는 배를 보이고 누웠다. 그 모습을 찍어 친구 언니에게 전송했다.



'어머, 얘가 이러는 애가 아닌데. 네가 지난번에도 왔던 걸 기억 하나보다.'


몇 년이 지난 오랜만의 방문, 루크는 많이 바뀐 스타일에도 나를 알아보았던 것이다.


어떻게 알았어? 냄새로 안 거야? 나 나쁜 사람 아니라고 믿어주는 거야?


루크의 보드라운 털을 만지며 눈시울이 뜨끈해졌다.


요즘은 화장도 하지 않고 주로 운동복을 입고 자유로운 모습으로 살고 있긴 하지만, 다른 사람을 처음 만나기 전에는, 어떤 옷을 입어야 할지 머리는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 될 때가 있다. 이따금씩 나는, 가만히 앉아 나를 바라보고 눈을 깜빡이던 그날의 루크를 떠올린다. 포장에 가려진 타인의 진심과 진의를 바라보는 루크의 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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