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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나 Jul 05. 2023

있는 그대로를 볼 수 없다

<칼의 노래>를 필사하며

하루가 시작된다. 오늘도 필사노트 한 바닥을 채웠다. 김훈의 <칼의 노래>는 2022년 12월 4일에 처음 시작하여 2023년 7월 5일인 지금도 여전히 진행 중이다. 오늘의 노래는 외로웠다. 이순신 장군이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고 일본이 곧 철수할 것이라는 정보를 알게 된 날이었다. 조용하던 조선을 다 헤집어 놓은 적을 그대로 도망가게 둘 순 없다고 생각하지만, 선조도, 명나라 수군도 이순신과 뜻을 같이하진 않았다. 그는 혼자였다. 곧 생애 마지막 전쟁인 노량 해전이 시작될 것이다. 끝은 알지만 과정을 알지 못하는 나는 사실보다는 그의 마음에 집중하기로 했다. 그의 외로움이 손끝으로 전해졌다.  

     

하루하루가 쌓여 공책이 두 권이 되었다. 이제 곧 두 권이 모여 나만의 <칼의 노래>가 완성될 것이다. 필사를 한다는 건 나에게는 작가와 좀 더 가까워진다는 뜻을 포함한다. 이순신 장군의 이야기지만 김훈 작가가 해석하고 상상하여 만들어낸 이야기기 때문이다. 눈으로 책을 읽었을 때는 이순신 장군만 보였지만 손으로 책을 읽는 지금은 김훈 작가의 눈으로 이순신 장군이 보인다. 나는 내 눈을 비우고 온전히 작가의 눈을 통해 장군을 보고 싶었다. 내 틀을 벗어나 다른 사람의 세상을 구경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따라가기만 하면 되는 일이므로 마음이 무겁지 않았다.      


필사는 문장을 읽고 외워서 공책에 다시 적는 작업의 반복이다. 여기에는 눈과 손 그리고 어느 정도의 기억력과 이해력만 있으면 된다. 필사를 처음 시작할 때는 글의 내용보다는 손에 집중했다. 왼손으로 시작한 필사였기 때문이다. 시간이 많이 걸리기도 했지만 손가락 힘 조절이 쉽지 않아 한 자 한 자를 꾹꾹 눌러 적었다. 왼손에 온통 신경이 몰려 책의 내용을 한꺼번에 외워 적을 여력이 없었다. 자연스레 몇 자 적지 못하고 다시 책을 봐야 했다. 글씨는 꼬불거렸지만 한 문장도 여러 번 봐야 했던 탓에 내용이 틀린 부분은 없었다. 내가 쓴 문장은 곧 김훈 작가가 쓴 문장 그대로였다.      


필사 속도는 느렸다. 나는 글씨의 서투름과 느린 속도가 좋았다. 이는 심리학 용어로 따지면 퇴행일지도 모를 마음이었다. 왼손 글씨체는 내 몸 안에 여전히 유아기 때의 모습이 있다고 알려주었다. 이것을 찾아 조금씩 훈련하는 것은 내가 다시 유치원생으로 돌아간다는 뜻이기도 했다. 서툴러도 되고 느려도 됐다. 필사하는 동안에는 나는 내가 귀여웠다. 바쁘고 정확해야 하는 일상 가운데 뭐든 괜찮은 시간, 온전히 나로 살 수 있는 작은 시간은 내가 나를 보호하는 포근한 시간이었다. 느리지만 정성스럽게 하루하루를 길렀다. 왼손도 조금씩 나이를 먹어갔다.     

<내 생각대로 적어서 다시 고친 부분>

시간이 지나면서 왼손에 힘이 생겼다. 글자를 쓰는 속도도 빨라지고 획의 꼬불거림도 많이 줄었다. 나는 점점 글씨체보다 책의 내용에 집중하기 시작한다. 외워서 쓰는 내용의 길이도 늘어난다. 가끔 한 문장을 통째로 외워 쓸 때면 내용도 글씨도 마음에 들어 뿌듯하다. 누가 뭐라 하지 않아도 나는 내 왼손이 크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지금은 어린이쯤 되는 듯하다. 어린이는 어린이 나름의 걱정거리가 있다. 나만의 생각이 생겨나는 시기이기 때문이다. 왼손에 신경 쓰는 것이 줄어들면서 대신 그 사이 생긴 여백에 나의 생각이 들어가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온전히 김훈 작가의 길이 걸어지지 않았다. 분명 문장을 외워 공책에 그대로 적었는데 작가의 표현이 아니라 나의 표현으로 바뀌어 적고 있었다. 처음에는 실수라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나도 모르게 작가의 세계에 내 색을 섞고 있는 것이었다. 


있는 그대로를 본다는 것은 생각보다 어려웠다. 계속 틀리는 내 필사가 증거였다. 내가 나를 온전히 비워내야만 가능한 일인데 비워지지가 않았다. 나이가 들고 내 생각이 생긴다는 건 나만의 기준이 생긴다는 것과 동시에 색안경을 껴야만 세상이 보이는 시력을 가질 수밖에 없다는 뜻인 듯했다. 내가 나의 걸림돌이라니 좀 난감하다. 생각을 지우고 있는 그대로의 문장을 보고 외우자. 그리고 그것을 종이에 적자. 매일 아침 필사를 시작하며 내게 하는 말이다. 나를 앞세우려는 마음을 접어야 그곳에 김훈의 <칼의 노래>가 온전히 있을 수 있을 것이다. 나이상으로는 이미 '어른'이 된 나에게 아직 어린 왼손이 있어서 다행이다. 오른손이 좀 더 가벼워질 때까지 왼손이 조금 천천히 크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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