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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나 Feb 03. 2023

필사는 왜 할까

김훈 <<칼의 노래>>

   필사1[筆寫] : 책이나 문서 따위를 베끼어 씀

필사의 의미를 사전에서 찾아보았다. 뜻이 조금 부족하게 느껴졌다. 단순하게 베껴 쓰는 행위가 다일까. '필사'는 한자이고 '베끼다'는 한글인 것 외에 두 단어가 가진 다른 점은 없을까. 내가 필사를 하며 재미를 느끼는 이유는 베끼는 것이 재미있기 때문은 아니다. 나의 재미 속에는 처음 책을 읽을 때는 찾지 못했던 부분을 적으며 다시 찾아가는 맛도 포함된다. 눈의 속도와는 다른 손의 속도를 따라가는 것이 나를 더 차분하게 만들어주어 명상의 맛도 느낄 수 있다. 그렇다면 내가 생각하는 필사는 사전적 정의에 무엇을 더 보태면 될까.


필사2[必死] : 죽을 각오를 하고 힘을 다함

사전에서 필사의 두 번째 의미를 찾았다. 첫 번째 필사[筆寫]와 한문이 다른 필사[必死]는 '죽을 각오를 하고 힘을 다함'이었다. 우연히 같은 발음으로 만들어진 두 단어지만 2가지 뜻을 합치면 어떨까 싶었다. 내가 아침마다 하고 있는 필사는 7세 조카의 놀이와 닮았다. 조카는 현재 자신의 손에 있는 장난감이 세상에 유일한 것처럼 온전히 그 놀이에 집중한다. 어제 자신이 했던 일에 대한 반성을 불순물처럼 놀이에 섞어 재미를 희석시키지 않는다. 잡생각이 많은 나도 필사를 할 때만큼은 다른 생각을 하지 않는다. 책에 촘촘히 그물을 쳐서 전에 읽으며 놓쳤던 부분까지 찾아 글로 적는다. 연필 소리 외엔 아무것도 들리지 않으니 온 힘을 다해 노는 시간이 맞다.


가끔 학생들이 필사를 왜 하냐고 묻는다. 책이나 문서 따위를 베껴 쓰는 행위는 잘못했을 때 받는 벌 아니냐는 눈빛으로 나를 본다. 그러게. 필사를 굳이 왜 할까. 충분히 이해가 가는 눈빛이라 일단 나도 같이 웃고 본다. 그리고 생각 없이 놀 수 있는 시간이기 때문이라고 답한다. 대가나 효율성을 따지지 않고 오직 재미만을 위해 필사에 집중할 수 있는 출근 전 짧은 시간은 더 이상 아이일 수 없는 나에게 아이 같은 미소를 짓게 해 준다. 나이는 어른이지만 아직 아이인 나를 온전히 받아주는 순간이기도 하다. 학생들이 내 두리둥실한 대답에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필사를 하는 내공이 더 쌓여야 할 것 같다. 좀 더 구체적인 설명을 할 수 없어 아쉽다.


요즘 김훈의 책 <<칼의 노래>>를 왼손으로 필사[筆寫] 중이다. 내 왼손 글씨체는 연필을 꾹꾹 눌러 정성만 한가득이다. 이순신 장군의 칼솜씨와 내 글솜씨는 정반대인 듯하지만 진심을 담았다는 측면에서는 같다. 감히 건방지게 역사적 위인과 나를 비교할 용기가 생긴 것은 <<칼의 노래>>를 접하며 이순신 장군도 나처럼 속으로 욕도 하고 무서워서 식은땀도 흘리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어서이다. 필사를 하며 이순신 장군을 좀 더 촘촘히 알아간다. 

<배설과 이순신의 대화>

한 달 전쯤 필사를 하다가 출근 시간을 살짝 놓친 적이 있다. 배설과 이순신 장군이 기싸움을 하는 장면이었는데 긴장감에 필사를 멈출 수가 없었다. 배설은 칠천량 해전에서 싸우지 않고 배 12척을 빼돌려 살아남은 자이다. 조선 해군이 거의 전멸하다시피 한 전쟁에서 자신만 도망쳐 살아남은 장수였지만 이순신 장군은 배설이 숨겨둔 배 12척을 가지기 위해 그의 존재를 참을 수밖에 없었다. 온몸에 힘을 주고 배설을 향한 적대감을 받아냈다. 필사를 하며 처음으로 이순신 장군의 마음을 온전히 느꼈다. 무서우리만치 무거운 책임감이었다. 영화나 책을 통해 간접적으로 전해지는 것이 아니라 내가 마치 장군의 마음속에 들어가 있는 듯했다. 책을 읽기만 했을 때는 느끼지 못한 부분이었다. 


나는 지금 이순신 장군이 부르는 칼의 노래를 내 속도에 맞게 조절하며 듣고 있는 중이다. 쓰는 행위는 읽는 것보다 시간이 많이 걸린다. 느리게 진행될 수밖에 없는 필사의 시간은 책 속에 담긴 이야기를 느리게 그리고 좀 더 깊이 받아들일 수 있게 해 준다. 어눌한 왼손은 그 속도를 좀 더 늦춰준다. 느리게 흘러가는 시간이 내가 필사를 하는 이유인지도 모르겠다. 모든 것이 빠르게 움직이는 세상에서 느릴수록 좋은 나만의 시간을 만들어가는 것이 나를 어떻게 변화시킬지 궁금하다. 그것을 알기 위해서라도 좀 더 필사적으로 이순신 장군을 따라다녀야겠다.


필사3 : 책이나 문서 따위를 손의 속도로 온전히 베끼는 놀이

현재 내가 생각하는 필사의 정의다. '정성스러움'과 '재미'로 글을 베낀다는 뜻을 포함한다. 필사를 왜 하는지는 하면서 계속 생각할 것이다. 시간이 지나 내가 하는 필사의 깊이가 달라지면 오늘 만든 정의도 좀 더 깔끔하게 수정이 되지 않을까. 필사를 시작한 지 1년도 지나지 않았는데 벌써 필사가 무엇인지 안다고 글을 적는 것 자체가 주제넘는 행동일지도 모른다. 그래도 일단 하고 본다. 필사는 필사를 해 본 사람만이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생각이 변하는 과정을 살펴봐야겠다. 결론 없이 과정만 있는 길일지라도 그 자체로 의미가 있을 거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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