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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나 Jul 18. 2023

김훈<칼의 노래> 필사를 끝내며

<마지막 필사>

<칼의 노래> 필사는 2022년 12월 4일 오전 5시 33분에 시작하여 2023년 7월 18일 오전 6시 30분에 끝이 났다. 매일 아침, 저녁으로 공책 한 바닥의 양을 쓰곤 했었는데 오늘 아침에는 이순신 장군의 마지막을 자를 수가 없어 평소의 두 배가 되는 양을 썼다. 왼손가락이 쥐가 나도 계속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리긴 하지만 내 손가락의 아픔이 장군의 마지막 고통과 맞닿아 있길 바랐다. 손으로 책을 읽는다는 것은 이런 것일까. 천천히 쓰이는 이순신 장군의 마지막이 느린 속도만큼 마음에 깊게 스며들었다. 필사본 끝에 날짜와 시간을 썼다. 출렁거리는 배에 몇 달을 머물다가 육지에 도달한 날이었다.


필사가 끝난 후 왼손이 떨렸다. 의자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독서대 위에 놓인 익숙한 책과 공책을 봤다. 손때 묻은 공책은 더러워서 더 나의 것이었다. 지금 느끼는 공허함과 서운함은 지난 8개월간 신나게 놀았다는 증거일 것이다. 필사를 왜 하는지 사람들은 묻는다. 굳이 왼손인 이유도 묻는다. 나도 시간 날 때마다 공책을 펼치는 나에게 가끔 묻기도 한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그중 하나는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면이 하나도 없어서다. 지금 나는 책 한 권을 다 끝냈다고 해서 성취감이 느껴지거나 뿌듯하진 않다. 한바탕 잘 놀았다는 느낌만 남아 있을 뿐이다. 그래서 필사는 나에게 온전한 놀이 같다. 잘 놀았다고, 고마웠다고 책을 보며 혼자 중얼거렸다.     


이순신 장군은 내가 상상했던 영웅은 아니었다. 사방의 적을 강한 힘으로 밀어내는 것이 아니라 여린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분이셨다. 임진년 싸움에서 생긴 총상과 정유년 선조의 고문으로 생긴 상처가 이순신 장군의 몸에 기생하고 있었다. 조선을 돕기 위해 온, 명의 총병관 진린이 도망치는 왜적과 은밀한 내통을 하는 것을 알았을 때 절망감으로 몸부림쳤다. 그래도 그는 제자리에 있었다. 그에 대한 내 마음은 듬직함이 아니라 안쓰러움이었다. 이순신 장군에 대한 환상이 깨질수록 점점 더 필사에 집중했다. 그의 괴로움을 내 손끝으로 느꼈다. 동시에 편안하게 앉아 필사를 하는 것이 미안했다.

이순신 장군과 함께 하며 나는 영웅에 대한 정의를 바꿨다. 밤마다 식은땀을 흘리는 그의 모습과 못마땅한 사람들을 앞에 두고 속으로 징징징 울어대는 그의 칼의 노래는 영웅이란 평범하지만 자신의 길을 묵묵히 걸어가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했다. 노량 해전에서 총을 맞고 선실에 누워 밖을 보는 이순신 장군을 그려봤다. 그가 그토록 원했던 전쟁터에서 맞이한 적에 의한 죽음이었다. 김훈 작가는 자연사라고 표현했다. 생각보다 슬프기보다는 편안해 보였다. 책에서는 늘 무거운 노래만 들렸던 것 같은데 마지막은 그렇지 않아 다행이었다. 자신이 원하는 죽음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평생 무겁게 살아온 분에 대한 삶의 보답이었을 거라 생각한다. 그의 죽음에 나의 죽음을 생각해 본다. 나는 나에게 맞는 자연사를 찾을 수 있을까. 그리고 지금 내 삶은 자연사를 할 수 있는 토대가 될까.


나의 왼손과 이순신 장군의 걸음은 닮았다. 왼손은 느렸고 서툴렀지만 그래서 한 자 한 자에 정성을 온전히 쏟을 수밖에 없었다. 이순신 장군이 전쟁을 대하는 모습도 그러했다. 힘이 부치는 전쟁이지만 가야 할 곳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그저 꾸역꾸역 나아갔다. 개인적인 욕심이나 현실적인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 임진년부터 시작된 전쟁으로 셀 수 없이 많은 백성들이 피해를 입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했다고 해서 일본군을 조선 땅에서 곱게 철수하도록 놔둘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안타깝게도 노량 해전이 끝날 때까지 철수하려는 일본군과 가지 못하게 막는 이순신 장군의 함대 사이에는 수수방관하는 조선 조정과 명나라 수군과 육군이 있을 뿐이었다. 사방이 그의 적이었다.


8개월은 적은 시간이 아니다. 한 책을 이렇게 천천히 본다는 것은 왼손의 서툶이 아니었다면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왼손 중지 옆에 생긴 생채기를 본다. 오늘 아침 필사를 하며  손가락에 힘을 꽉 줬던 탓에 더 성이 나있다. 시간이 좀 더 지나다 보면 굳은살이 박일 것이다. 그리고 왼손의 움직임도 지금보다는 좀 더 세련될 것이다. 그때도 아마 나는 오늘처럼 뿌듯함 대신 서운함을 느낄 것 같다. 서툴러서 느리게 갈 수 있는 시간에 대한 아쉬움 때문이다. 어린아이에게만 주어진 시간이라 생각했었다. 유년기가 한참 지난 나는 그런 시간을 보내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필사를 하며 그런 시간을 다시 느낀 것이다. 아이와 어른이 내 속에서 함께 논다. 조금 더 천천히, 조금 더 서툴게 살고 싶다. 한바탕 잘 놀다간다고 말하며 죽음을 맞이하는 것이 아마도 훗날 나의 자연사일지도 모르겠다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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