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마나 Sep 10. 2023

법정 스님과 조지 오웰 사이

 <무소유> 필사를 끝내며

<무소유> 마지막 필사

법정 스님 책 <무소유> 필사가 끝났다. 2023년 7월 19일에 시작하여 2023년 9월 8일에 마무리를 했으니 스님과 대략 50일 동안 매일 아침 대화를 나눈 셈이다. 매 순간 집중하며 스님 말씀을 경청한 것은 아닌 것 같아 필사 공책이 듬성듬성해 보였다. 책을 책장에 바로 넣지 못하고 만지작거렸다. 마지막 페이지에서 다시 앞장으로 돌려 보는데 아쉬움이 몰려왔다. 필사를 시작하며 책의 모든 내용을 속에 다 넣겠다던 욕심을 채우지 못했기 때문이다. 어처구니가 없긴 하지만 <무소유> 필사를 끝내며 보게 된 것은 <무소유>를 소유하고 싶었던 어리석은 중생의 모습이었다. 처음 시작부터 내 마음과 책의 내용이 반대였음을 왜 몰랐을까. 작지만 너무 커 보이는 책을 한참 쳐다보다 씁쓸히 책장에 꽂았다. 


책에는 한문이 꽤 있었다. 처음에는 한자를 적는 것이 낯설어 내용만 이해하면 된다는 얄팍한 생각으로 한글만 적었었는데 매일 필사가 끝날 때마다 적지 않고 넘어간 한자가 눈에 들어오면서 괜히 찝찝했다. 어느 날 용기를 내어 슬쩍 한문을 따라 적어보았다.(사실 '그렸다'가 더 맞는 표현이다.) 생각보다 성가시지 않고 재미가 있었다. 조금씩 그리는 횟수를 늘려보았다. 상형문자라 모양에 뜻이 들어 있는 경우가 많아 '숨은 그림 찾기'처럼 느껴지기도 했고 비슷한 한문이 반복되어 나오니 저절로 익히는 쾌감을 맛보기도 했다. 지금은 한자 적는 것이 제법 익숙해진 것을 보면 뭐니 뭐니 해도 시간이 약이 맞다 싶다. 낯섦도 익숙함도 영원하지 않다는 것을 스님은 '무소유'란 말로 표현하신 것은 아닐까. 


 <무소유> 다음으로 할 필사 책을 고르는데 낯선 한자를 필사한 경험은 도움이 되었다. 책 내용에 완전히 집중하지 못한 아쉬움과는 별개로 내 손은 제법 용감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나름 근육질이 된 왼손가락은 뭐든 쓸 수 있다고 으스대며 나보고 아무거나 선택하라고 큰소리를 쳤다. 나는 며칠 책장 앞을 서성이다 조심스레 영어 원서 쪽으로 눈길을 돌렸고 몇 가지 책 중 고민을 하다가 학생들과 매년 읽었던 <동물농장>의 원서를 손에 들었다. '할 수 있을까'란 질문을 하고 답하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걱정보다는 호기심이 앞섰다. 한국어가 모국어인 동물들과 영어를 사용하는 동물들은 같은 옷 다른 느낌으로 내게 새롭게 다가올 것이다. 온전한 조지 오웰의 필력을 그대로 느껴볼 수 있다는 것도 흥미진진했다.

<동물농장> 첫 필사

오늘 아침 처음으로 <동물농장>에 들어갔다. 소설은 한글판으로 세 번 넘게 읽은 탓에 영어 원서라도 크게 낯설지 않았다. 큰소리치던 왼손도 제법 제 역할을 하여 완벽하진 않지만 영어 획도 크게 꼬불거리진 않았다. 공책 1바닥을 채우니 책 1페이지가 조금 넘게 적혔다. 총 137페이지 분량이라 대충 계산을 해보면 130일 정도를 동물농장 속에서 지낼 듯하다. 중간에 게을러지면 좀 더 늦어질 수도 있는 거고. 끝을 두고 시작하지 않으니 시작도 가볍다. 법정 스님과 조지 오웰 사이에서 그리움과 신선함을 동시에 느끼며 며칠 지내긴 하겠지만 스님은 기억마저도 소유하려 들지 말라고 할 테니 그저 주어진 시간을 받아들이는 것으로 태도를 잡아본다.


이런 내 모습을 보고 친구가 농담으로 필사를 필사적으로 한다고 했다. 지루해 보이는 작업을 무슨 부귀영화를 누리겠다고 매일 아침 하고 있는 건지 궁금해할 것도 같았다. 나도 필사하는 정확한 이유를 아직 잘 모른다. 매일 적으며 이유를 찾는다는 대답밖에 할 수가 없다. 생각보다는 지루하지 않고 나름의 재미가 있다고 말하고 싶지만 구체적인 예시를 들어 남들을 이해시킬 표현력이 내 안에는 없다. 필사하기를 권할 설득력은 더 없다. 그저 내게 재미있는 놀이라고 소개를 해줄 수 있을 뿐이다. 필사의 시간은 사실 '필사적'이기보다는 '미적지근하게'가 맞다. 앞으로도 나에게 필사가 필사적이진 않았으면 좋겠다. 하루도 똑같지 않은 일상 속에서 매일 아침 한 자 한 자 적어가는 필사를 통해 나름의 안정감을 찾는 것으로 만족한다. 


오늘 아침 필사한 부분에는 내가 <동물농장>에서 좋아하는 말 복서가 나왔다. 보통 말 두 마리 정도의 힘을 가진 복서가 살아갈 인생의 내용은 이미 다 알고 있지만 영어와 한국어 사이에서 혹시 놓쳤을 복서의 심리를 하나라도 더 찾아보고 싶다. 복서 이야기를 몰랐다면 처음 등장하는 장면에서 멋진 말을 상상하며 마냥 좋아했을 텐데 지금 나는 멋있다는 느낌 밑에 안타까움이 깔려 있어 온전히 그 장면에 집중이 안 된다. 이럴 땐 인쇄된 책이라도 보는 사람마다 이야기가 변하는 장치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얼토당토않은 생각도 한다. 손으로 책을 읽으면 속도가 늦어 그만큼 이야기의 여운이 더 오래 남는다. 마음 단단히 먹고 <동물농장>을 시작한다. 법정 스님이 이런 나를 응원해 주시리라 믿는다.

이전 07화 날짜로 책을 읽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