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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나 Sep 24. 2023

필사로 맺은 인연들

조지 오웰 <동물농장> 필사

요즘은 몽당연필로 필사를 한다. 덩치 큰 공책 옆에 있으면 유난히 더 작아 보인다. 귀여운 연필을 보니 영화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가 생각난다. 늙어 가는 시간도 어려지는 시간도 방향만 다를 뿐 흐르긴 마찬가지다. 몽당연필의 길었던 시절을 떠올리며 그와 함께 했던 지금보다 조금 젊었을 나를 덧붙여 본다. 필사는 혼자만의 시간이라 생각했는데 작아진 연필을 보니 소리 없이 나와 함께 해준 필사 동무가 있었구나 싶다. 각자의 시간이 흐르지만 우연히 만나 필사의 길을 같이 걸었다. 다른 연필이 아닌 바로 그 연필이 다른 사람이 아닌 바로 나를 만나 함께 시간을 보내며 조금 더 짧아지는 모습과 조금 더 나이 드는 모습을 서로 봐준 것이다. 시간이 더 흐르기 전에 몽당연필에 대해 적어본다. 그와의 인연이 소중했다는 고백이다.


짧은 연필과 나의 서툰 왼손은 제법 잘 어울린다. 둘은 서로 의지해 비틀거리며 나아간다. 왼손은 나이를 제법 먹었지만 제때 성장하지 못해 숨겨둔 나의 유아기적인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었다. 필사를 하며 그 아이를 키운다. 좀 더 일찍 만났다면 좋았겠지만 이제라도 만나게 된 게 어딘가. 엄마가 아기를 품에 안듯 필사를 하며 나의 왼손을 안았다. 삐뚤빼뚤한 글씨체가 삐딱하게 보이지 않았다. 그저 대견했고 그저 고마웠다. 시간이 지날수록 왼손 글씨체는 조금씩 안정이 되어 간다. 아직 오른손과 나란히 하진 못하지만 이제는 천천히 필기할 여유가 있을 때는 수업 시간에도 왼손을 사용한다. 오른손의 유능함과 왼손의 정성스러움이 제법 잘 어울린다. 일방적으로 이끌고 보조하지 않고 쌍방향으로 서로를 돕는다. 두 손의 우정이 쌓일수록 필사 노트와 함께 나도 덩달아 채워진다.


요즘은 한참 <동물농장>에서 지내고 있다. 동물들의 농장 운영이 내 필사 능력만큼 어설프다. 공책을 손으로 꾸역꾸역 눌러쓰며 '아니라고 말해야지!', '같이 먹자고 해!' 등 혼자서 잔소리를 연발한다. 내 입에서 나오는 자잘한 소리가 동물들의 입에서 큰 소리로 나올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긴 그랬다면 책 <동물농장>은 없었겠지. 저자 조지 오웰은 얄짤없이 동물들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 안타까운 것은 읽는 독자의 몫일뿐 나는 상관없다는 듯한 무심한 그의 문체가 얄밉다. 아무 말 못 하는 동물들의 삶에 돼지들의 횡포가 점점 스며들고 있다. 나는 허공에 대고 열심히 혼잣말을 하며 필사를 한다. 곧 사라질 말이라 할지라도 할 말은 하며 살자고 마음먹어 본다. 한글로 번역된 책에 '누가 돼지이고 누가 인간인지 분간할 수 없었다'는 대목을 기억한다. 그 부분이 원서에는 어떻게 적혀 있을지 궁금해 슬쩍 먼저 찾아보려다 그만두었다. 쓰다 보면 알게 되겠지. 느리지만 멈추지는 않을 왼손을 믿어본다. 


사람들은 내게 필사를 하는 이유를 묻는다. 답을 하기 위해 몇 번 시도해 봤지만 내 입에서 나오는 말들은 뜬구름 잡는 듯하게 들릴 것이 뻔했다. 남들에게 잘 설명할 재주가 나는 없었다. 좀 더 솔직히 말하면 필사를 하는 정확한 이유를 몰랐다. 지금도 필사를 하며 왜 하는지를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되묻는다. 필사를 제외하고 어떤 일을 하면서 이렇게 '왜'를 달고 다녔던 적은 없는 것 같다. 지금은 그저 한 번 해보시라고 권해드린다. 직접 해보는 것보다 명확한 답은 없는 것 같아서다. 며칠 전, 엄마가 생텍쥐페리의 책 <어린 왕자>를 필사하기로 했다고 하셨다. 멀리 떨어져 지내는 딸과 좀 더 같이 있는 듯한 느낌을 받기 위해 딸이 좋아하는 일을 함께 해보기로 하신 것이다. 엄마의 말씀에 가던 길을 멈추고 한참을 서 있었다. 나는 누군가를 이해하기 위해 그 사람을 따라 하기로 결정한 적이 있었던가. 필사와 엄마를 나란히 두고 생각해 본 적이 없어 낯설면서도 고마웠다. 나로 인해 시작한 필사지만 엄마와 어린 왕자의 만남이 나름의 의미가 있길 바란다. 


필사는 이제 내 일상의 일부가 되었다. 하루를 시작하는 놀이라 봐도 될 듯하다. 아침마다 공책 한 바닥씩을 적는다. 시간은 40분에서 50분 정도 걸린다. 쓰기가 끝나면 마지막으로 책에 오늘 날짜를 적는다. 필사의 끝은 오늘의 시작이다. 한바탕 잘 놀았다고 공책과 책을 몇 번 쓰다듬은 다음, 독서대에 다시 놓고 출근 준비를 시작한다. 편안한 아침이 내 필사의 이유 중 하나다. 가끔은 너무 편안해 책에 집중하지 못하고 그저 글자를 쓸 때도 있다. 그럴 때는 내가 지금 집중을 못하고 있구나 하고 그냥 봐준다. 내가 나를 마주 보고 있는 시간이다. 평소와는 달리 내 모습이 미워도 그냥 두는 내가 고맙다. 그 와중에도 왼손은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고 연필은 온몸으로 검은 선을 긋고 있다. 내용이 텅 비더라도 그날 하루쯤은 그냥 손운동 했다고 생각하고 넘어간다. 누가 뭐라 해도 필사는 놀이가 틀림없다는 증거다.


필사를 하며 요즘은 흔히 볼 수 없는 몽당연필을 본다. 매일 보지만 한 번도 본 적 없었던 왼손도 느끼기 시작했다. 그리고 <동물농장>을 읽으며 역사는 반복된다는 말을 실감한다. 지금 우리 사회와 비슷한 부분이 너무 많아 마음이 씁쓸하다. 더는 반복되지 않게 하기 위해 <동물농장>을 손으로 꾹꾹 눌러 기억할 것이다. 힘없는 기억일지라도 그 길이 내 길이라 믿는다. 책 한 권에 기대어 나의 길을 가고 있을 뿐인데 그 속에 여러 인연들이 숨어 있다. 오늘 맺어진 인연이 필사 바람을 타고 또 어디론가로 흐를 것이다. 언젠가 엄마의 어린 왕자를 나도 만날 수 있으면 좋겠다. 그땐 지금보다는 좀 더 편안한 마음으로 어린 왕자의 말을 들어줄 수 있길 바란다. 천천히 그리고 하나하나씩 맺어진 인연의 소중함을 기억하기 위해 오늘도 필사를 한다. 필사의 느린 속도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나는 느린 힘을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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