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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나 Aug 04. 2023

날짜로 책을 읽다

법정 스님 <무소유>

법정 스님의 책 <무소유>에는 글마다 쓴 날짜가 적혀 있다. 신문에 기고한 글을 묶어 책으로 내신 것 같은데 대부분 1970년에서 1973년 사이에 적은 것들이다. 글을 읽을 때마다 마지막에 적힌 날짜를 유심히 본다. 스님의 생애를 알고 있는 나는 시공간을 끼워 맞추는 재미가 솔솔하다. 1970년도의 스님에게 은근히 다음 행선지를 말해 주고 싶기도 하다. 책 <무소유>을 세 번째 읽고 있다. 읽을 때마다 다른 책 같다. 처음에는 가르침을 받고자 조심스럽게 읽었고 두 번째는 줄을 쳐 가며 내 생각과 스님의 생각을 섞었다. 이번에는 필사를 하며 읽는 중이다. 글을 쓴 날짜를 챙겨보니 스님의 삶이 글과 연결되었다.  '아, 스님이 다래헌에서 도선생(盜先生)을 만나셨구나', '1970년도에는 글을 적을 때 자기 검열을 좀 해야 했을 텐데 용기를 내셨구나' 등을 생각했다. 좀 더 가까운 곳에서 대화를 나누는 느낌이었다.


 <무소유>를 적으셨을 때 스님의 나이는 지금 나와 비슷했다. 늘 나이가 많은 모습만 뵀었는데 날짜 덕분에 스님이 내 또래로 보여 혼자 웃었다. 물리적인 나이가 비슷한 것이 크게 의미가 없다는 것을 알지만 <무소유>라는 책을 다른 각도로 읽고 싶어 마음속 스님을 가볍게 만들어 보았다. 그러자 글 속에서 스님 나름의 유머가 보였다. '나는 그야말로 개 밥의 도톨이가 되고 말았다', '제기랄, 그건 말짱 오해라니까'. 교훈을 얻기 위해 책을 읽을 때는 눈에 들어오지 않던 부분이었다. 새로운 스님의 모습이 신기하고 편안해서 나는 즐거웠다. 그러다 문득 궁금해졌다. 스님은 글을 쓰며 편안하셨을까, 아니면 이런 말 써도 되는지 고민을 하셨을까. 글을 쓰며 자기 검열을 꽤 하는 나는 점잖은 스님도 한 번쯤은 고민하지 않았을까 싶었지만 더 깊은 속마음은 그러지 않아도 된다고 말해줬으면 좋겠다는 것이었다. 글을 읽으며 스님에게 이런저런 질문을 던졌다. 대화가 길어졌다.

<무소유>를 읽으며 제일 와닿은 것은 글 전반에 깔려 있는 회심(回心) 즉, 마음을 돌이키는 것이었다. 스님은 탁상시계를 훔친 도둑과 우연히 마주쳤다. 그리고 겸연쩍어하는 도둑을 모른 체하며 본인의 시계를 다시 도둑에게 돈을 주고 샀다. 본래 내 물건은 하나도 없다는 불교의 가르침으로 스님이 마음을 고쳐먹어 가능했던 일이다. 당장 눈앞에 내 물건을 훔친 사람이 있지만 올라오는 괘씸함을 자비로 바꾸는 회심은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닐 것이다. 1972년 4월에 있었던 이야기가 2023년 8월 나에게 와닿았다. 생각을 돌이켜 바라보는 마음. 그것은 어떻게 해야 가질 수 있는 것일까. 이것도 생각 습관이니 특별한 방법을 찾지 말고 그저 지금부터 순간순간 애써 보라고 스님이 말씀하시지 않을까. 필사와 비슷하게 하루씩 쌓아가는 것. 매일 조금씩 회심을 내어보는 것. 그것이 답일 듯했다.


내 또래가 된 스님 덕분에 필사를 하며 마음이 점점 더 가벼워진다. 내친김에 용기를 내어 스님의 생각을 살짝 비틀어보기도 했다. 회심은 있었던 일을 그저 합리화시키려는 회피와 비슷한 마음일 수도 있지 않을까. 회심과 합리화 사이에서 무엇을 경계해야 할까. 종단의 몇몇 사무승의 농간으로 절 땅이 팔리고 수천 그루의 소나무들이 잘려나갔을 때 스님은 마음속 분노를 회심으로 다잡았다. 불편한 현실을 다른 시각으로 바라보는 것. 그 땅은 본래 절의 것이 아니니 서운할 일도 아쉬울 일도 없다는 생각이었다. 나는 현실이 잘못 흐르고 있지만 그것을 다잡는 것보다는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려는 스님의 모습에서 회심과 합리화 두 가지를 모두 보았다. 헷갈렸다. 그러다 글 속에 다 담지 못한 스님의 모습이 있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최선을 다해 반대하셨을 것이다. 그래도 세상 일이 뜻대로 풀리지 않아 분한 마음이 생겼을 것이다. 최선을 다했다면 그땐 생각을 바꾸어 보는 건 어떨까. 미흡한 중생이 스님의 뜻을 다 알 수는 없지만 현재의 나는 여기까지 회심을 이해했다. 두고두고 살펴볼 생각거리다.

<손바닥보다 조금 더 크다>

<무소유>는 얇고 작은 책이다. 책의 표지와 편집 등이 글의 내용처럼 담백하다. 책이 만약 두꺼웠다면 어땠을까. 좀 더 읽기 쉽게 편집이 되어 있다면 어땠을까. 수수하다 못해 없어 보이는 책을 달리 만들어보려고 머릿속에 그려보다 스님이 호통을 칠 것 같아 그만두었다. 시간이 남아서 쓸데없는 것에 신경 쓰고 있냐고 핀잔을 주지 싶었다. 정신을 차리고 다시 책을 보았다. 글 외에 아무것도 담지 않는 것이 <무소유>에 맞겠구나 싶었다. 작고 낡은 책은 책장을 넘기면서도 넘기기 아까운 그런 책이다. 한자를 잘 모르지만 책을 읽으며 한자도 유심히 본다. 스님은 뭐 하러 이렇게 어려운 한자를 섞어가며 글을 썼는지 속으로 툴툴거릴 때도 있다. 그래도 스님을 계속 따라간다. 필사로 책을 읽는 것은 곱씹을 수 있는 시간이 있다는 뜻이다. 이번에는 한자에 익숙해질 수 있는 충분한 여유가 있어 좋다. 스님의 말씀대로 생각을 바꾸니 처음에 성가셨던 한자가 재미있어졌다. 회심은 이런 마음이구나 싶어 어깨가 저절로 으쓱거려진다.


<무소유>를 필사하며 1970년대를 느끼고 있다. 요즘 책과는 달리 한자도 많고 안 쓰는 용어도 꽤 많다. 글을 읽기 불편하지만 내가 불편하다고 책을 바꿀 수는 없는 일이다. 책을 읽고 나를 바꾸어 간다. 손바닥보다 조금 더 큰 책일 뿐인데도 소화시키는 것보다 그냥 흘려버리는 것이 더 많다. 아쉽지만 책을 소유하고 싶다는 욕심을 조금씩 내려놓으려 한다. 스님이 말씀하신 '무소유'를 나는 어떻게 받아들이며 살아가게 될까. 책과 함께 하는 시간을 쌓아간다. 그 시간의 날짜를 찾아보고 적어본다. 2023년 8월 3일, 오늘의 나는 '무소유'를 너무 무겁게 받아들이지 않으려 노력하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아직 필사할 부분이 많이 남아 있어 좋다. 나와 비슷한 나이로 되돌아와 말동무해 주셔서 고맙다고 스님께 말씀드리고 싶다. 앞으로도 잘 지내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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