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브런치북 1일1선택 13화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마나 Jun 19. 2024

꽃 하나만 그려줘

“마나! 꽃 하나만 그려 주실 수 있나요?”    

 

몇 년 전에 가르쳤던 테디(학생)으로부터 메시지가 왔다. 갑자기 웬 꽃 이야기인가 싶어 메시지 앞뒤를 다시 봤지만 질문 외에 다른 문장은 없었다. 느닷없는 질문은 느닷없이 답하면 되지 않을까. 꽃 그림 가지고 뭐 하려고 그러냐, 요즘 어떻게 지내냐, 그림 솜씨는 없는데 괜찮겠냐 등의 질문으로 늘어진 메시지를 보낼 필요 따윈 없었다. 나는 곧장 펜을 꺼냈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꽃은 여러 가지였지만 그중 둔한 내 손을 거쳐 세상 밖으로 나올 수 있는 꽃은 많지 않았다. 안개꽃을 생각하며 해바라기를 그렸다. 하나도 닮지 않은 두 꽃이지만 그 순간 나에게는 같은 꽃이었다.     

안개꽃을 품은 해바라기를 테디에게 보냈다. 그는 이십 대 특유의 발랄함을 담아 내 그림이 귀엽다는 답장을 보내왔다. 열심히 그리긴 했지만 크게 자신은 없었는데 귀엽다는 말 한마디에 마음이 놓였다. 역시 나는 아직 칭찬이 필요한 나이인가 보다. 내 손을 떠난 꽃은 더는 내 것이 아니었다. 안개꽃을 그리지 못한 아쉬움도 해바라기를 완성한 기쁨도 금세 날아갔다. 그리고 그림 하나를 사이에 두고 주고받은 대화만이 마음속에 남았다. 피로한 몸에 생기가 도는 듯했다. 나도 전직 이십 대였으니 내 몸 어느 구석에 남아 있을 활발함을 찾아 꺼내야겠다고 생각했다. 내가 그린 꽃을 다시 보았다. 내 눈에도 제법 귀여워 보였다. 


꽃도 귀소 본능이 있는 게 틀림없다. 며칠 뒤, 느닷없는 문자가 또 날아왔다. 아무 생각 없이 메시지를 열다가 순간 눈도 껌뻑거리지 않고 몇 초를 흘려보냈다. 테디가 보내준 메시지에는 40송이의 꽃 그림과 함께 마음을 담은 글이 들어 있었다. 그중 하나가 내가 그린 해바라기였다. 그가 만든 꽃밭에 자리 잡은 꽃들은 크기도 모양도 제각각이었지만 모두가 테디를 향하고 있었다. 무의식적으로 내 해바라기보다 더 잘 그린 그림이 몇 개 있는지를 찾았다. 꽃은 서로를 보며 비교하지 않는다 했는데 목을 빼고 순위까지 매기고 있는 나를 보며 꽃밭에 있을 자격이 없다는 생각을 했다. 경쟁에 찌든 내 모습과는 달리 꽃들은 각자의 얼굴로 생글거렸다. 테디와 그의 주변 사람들이 나에게 몸에 힘 좀 빼고 지내라고 말해주는 듯했다. 몸에 붙은 먼지를 털어내기 위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다시 그림을 살폈다. 그제야 꽃들이 제대로 보였다.

테디는 그림 밑에 꽃밭을 만든 이유를 적어 주었다.  ‘너와 함께여서 행복하다’는 말 대신 ‘꽃을 그려달라고 했다’라는 문구를 보고 있으니 며칠 전 내가 테디와 대화를 한 후 기운을 차렸던 이유를 알 듯했다. 네 마음을 보여줘서 내가 힘을 받았던 거구나. 그의 꽃밭에서 내 꽃이 반짝이고 있었다. 주변 꽃들과 어울리며 혼자 있을 때보다 더 귀엽고 귀엽게 햇빛을 받으려 애쓰고 있었다. 모두의 마음이 선명하게 보이는 꽃밭이었다. 테디가 만들고 싶은 세상도 이 그림과 같지 않을까. 오늘은 꽃 그림이지만 언젠가는 꽃과 같은 40명의 사람들과 다정하게 찍은 사진을 보내줄 것 같다. 사람 좋아하는 테디는 꼭 그렇게 살 것이다. 꽃밭을 보고 있자니 산뜻한 향이 느껴졌다. 그 속에 나의 체취도 섞여 있다는 사실이 좋았다.


"꽃 하나만 그려죠.” 


테디는 40명 모두에게 똑같은 질문을 던졌다. 그리고 우리는 당연하게 모두 다른 답을 했다. 다행히 테디는 어린 왕자처럼 까탈스럽진 않았다. 꽃에 뿔이 있어도 나이가 들어 시들해도 다시 그려달라는 말 대신 "꺄악~!" 하며 '귀엽다' 소리를 연발했다. 모든 꽃은 서로 달라 좀 더 특별한 테디의 꽃밭을 만들어 냈다. 그의 넉넉한 품이 있어 가능한 그림이 아니었을까. 테디의 꽃밭을 보며 나를 되돌아봤다. 바쁘다는 핑계로 주변 사람들을 챙기지 않고 산 지가 꽤 되었다는 생각을 했다. 문득 머릿속에 떠오른 옛 친구도 있었다. 지금 내 꽃밭에 다시 그 사람들을 초대할 수 있을까. 마음과는 달리 선뜻 답이 나오지 않았다. 사람들에 대한 아쉬움보다는 혼자 있는 편안함이 더 크기 때문일 게다. 꽃밭도, 느닷없는 메시지도 아무나 보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괜히 나이 탓만 하며 내 꽃밭에 대한 생각을 빠르게 접었다.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꽃밭에는 꽃들이 모여 살고 사람 옆에는 사람이 모여 산다. 그래, 그렇게 사는 게 더 자연스러운 삶은 맞다. 지금은 아니지만 언젠가 나도 옛 친구에게 전화해서 꽃 하나만 그려달라는 생뚱맞은 말을 할 수 있으면 좋겠다. 그 제자에 그 스승이니 나도 열심히 살다 보면 테디처럼 용감해질 날이 오겠지. 학교 안에서만 지내는 교사는 그 너머의 세상을 잘 모른다. 그런 나를 위해 가끔 학교를 나간 학생들이 새로운 세상을 보여준다. 나는 그저 고맙다. 테디 덕분에 잠시 일 생각 접고 사람 냄새나는 꽃밭 구경을 실컷 했다. 오늘도 테디를 향한 꽃들이 제자리에서 방긋거리며 행복하길 바란다. 그것이 돌고 돌아 결국 테디에게 돌아갈 될 테니 말이다.

이전 12화 머리채 싸움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