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한달살이 : 프롤로그
발자국 소리가 났어. 조용히 걸으려 해도 듬직한 몸무게 때문에 발걸음마다 존재감이 드러났지. 새벽 4시면 해가 뜨는 삿포로에서 돌아온 바로 다음 날이었어. 몸은 아직 내가 일본에 있는 줄 아는지 4시 30분에 눈이 떠지더라고. 하긴 한 달 반을 있었으니 그럴 만도 하지. 순간, 일본이 그리웠어. 여러 기억도 한꺼번에 떠오르고 말이야. 그럼, 이왕 깼으니 조금만 더 생각해도 될까. 급할 것 없는 나는 식구들이 깰 때까지 멀어지는 일본을 정리하며 새벽을 어슬렁거리기로 했어.
물 한 잔을 들고 거실 소파에 앉았어. 움직일 때마다 나는 소리가 거슬렸는데 다행히 식구들은 못 듣는 듯했지. 달라진 나의 아침을 보며 집으로 돌아왔다는 사실을 실감했어. 돌아올 거면서 왜 떠났을까. 온 지 하루 만에 다시 나갈 생각을 하는 역마살 가득 안고 태어난 나는 집에 오자마자 좋으면서도 싫은 마음이 들었어. 편안하고 아무 걱정하지 않아도 되는 곳, 내가 최고라는 착각을 하게끔 하는 곳이라 집에 있는 게 사치 같았거든. 떠돌아다니는 삶이 몸에 익어 폭신한 소파의 촉감이 어색했어.
"우린 거러지(거지)니까!"
일본에서의 마지막 일주일이 생각났어. 친구와 함께 홋카이도를 돌아다니며 보냈었는데 돈을 벌지 않는 올해 내 경제적 능력으로는 위치도 시설도 좋은 숙소를 찾긴 힘들었지. 그렇다고 죄 없는 친구에게 내 무거운 몸을 다 맡길 수 없는 거잖아. 겨우 우리에게 적절한 숙소를 찾아 짐을 풀었었어. 그리고 저녁에 밥을 먹고 동네 산책을 했지. 처음엔 아무 생각이 없었는데 걷다 보니 문득 주변 건물에 비해 우리가 묵는 곳이 초라하게 느껴지더라고. 살짝 위축된 우리는 길 한복판에서 숙소를 요리조리 뜯어보며 토론을 시작했어. 앞으로 남은 여행을 위해 스스로 주제를 정확하게 파악하는 시간이었다 생각해.
저곳마저 없었다면 우린 하고 싶은 여행을 못했을 거잖아. 머리를 맞댄 후 방을 잡은 것만으로도 다행이라는 결론을 냈어. 그러고 나서 앞에 있는 숙소를 다시 봤지. 눈은 마음의 창이 틀림없었어. 거품을 빼고 나니 허름했던 숙소가 제법 고풍스러워 보이기까지 했으니까. 나와 상관없는 주변 건물은 시야에 들어오지도 않더라고. 내 시력이 마음으로 조절 가능해서 다행이라 생각했어. 그러고 난 뒤엔 좀 더 당당하게 산책을 했던 것 같아. 같은 곳 다른 느낌으로 말이야. 조금 부족해서 조금 더 클 수 있는 거라며, 인생 잘 살고 있다고 우리 마음대로 낸 결론도 마음에 들었어.
돈을 신경 쓰되 노예는 되지 않기. 거러지 여행의 유일한 규칙이었어. 우린 꼭 하고 싶은 것에만 돈을 쓰고 다른 것엔 청승을 떨 수 있을 만큼 떨었지. 덜 쓰는 만큼 불편할 수밖에 없는 거잖아. 콘셉트에 딱 떨어지는 불편함은 우리에게 더는 서러움의 대상이 아니더라고. 홋카이도까지 와서 꼬질꼬질하게 놀긴 했지만 위축되지도 않고 말이야. 지피지기면 백전불태였지. 넉넉하지 않음을 알아서 위태롭지 않을 수 있었고, 여행을 즐길 수 있어서 당당했어. 제대로 주제 파악을 한 결과였다 생각해.
그 시간도 끝이 나고 나는 다시 집이야. 지금은 속에서 맴도는 거러지 여행과 일본에서의 한달살이를 되새김질하며 소화시키려 노력 중이고. 잘했는지 못했는지 평가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 스스로 낯선 곳에서 살기로 결심을 했고 생각한 대로 행동으로 옮겼으니까. 살다 보면 생각만으로 끝나는 경우도 많고 생각 없이 행동만 하다 허무해지는 경우도 있잖아. 둘의 합이 맞았던 시간은 그것 자체로 의미가 있었어.
끝은 곧 다시 시작이야. 이번에는 오랜만에 부모님 댁에서 한 달 살아보려 해. 집이 아니라 한달살이 숙소로 여기면서 말이야. 아무리 가족이라도 남이잖아. 가족이 내가 되는 순간 여러 가지 잡음이 들리기 시작하더라고. 혹시 알아? 이런 마음가짐이 묵혀 있던 가족 간의 문제도 해결해 줄지. 오랫동안 집 나가 살던 딸이니 떨어져 지낸 만큼 서로 적응할 시간도 가져보자고. 나도 허투루 살진 않았으니 예전보다는 성숙해졌을 거라 믿어 볼래. 식구들의 숨소리가 들려. 다들 편안하게 자고 있나 봐. 그럼 나도 편안하게 시작해도 되겠지? 앞으로 잘 지내보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