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 한달살이 : 뚫어 뻥!
오래된 변비 환자의 진정한 고통이 뭔지 알아? 매일 어느 정도의 답답함을 안고 살아간다는 점이야. 점점 퍽퍽해지는 세상에서 몸이라도 가뿐하면 좋겠는데 그것마저도 허용이 안 되는 거지. 꽉 막힌 몸과 마음에는 여백이 없잖아. 그래서 힘을 주게 되고 말과 행동이 더 딱딱해지나 봐. 어쩌겠어. 안에 있는 장이 쉬이 움직이지 않으려 하니 미약하나마 밖에서라도 열심히 응원해 주는 수밖에. 나는 오늘도 내 손이 약손이라 생각하고 뭉쳐진 응어리를 살살 쓰다듬어. 꽉 막힌 곳에서 고생이 많다는 말과 함께 말이야.
도시에 사는 사람들도 빽빽한 곳을 근근이 뚫어가며 살아가. 요즘같이 더운 날씨엔 하루를 무탈하게 보내는 게 더 쉽지 않지. 나라님도 백성의 답답함을 아시는지 고생하는 사람들을 위해 집 앞에서 일본 영화 '러브레터'를 무료 상영한다고 했어. 야외에서 보는 거라 더울 것 같았는데 다행히 저녁 날씨는 선선하더라고. 주차하느라 도착했을 땐 영화는 이미 시작한 후였어. 스크린 앞 큰 공간은 당연히 사람들로 꽉 채워져 있었지. 우리 셋은 함께 나란히 앉는 것을 포기하고 틈새 좌석을 공략했어. 흩어졌다 새로 모이는 전략은 제법 유연한 대처법이었다 생각해. 혼자 온전히 영화에 집중하고 다시 모였을 땐 몇 년 만에 만난 사람들처럼 할 말이 속에 그득했으니까.
나는 오랜만에 큰 무리의 사람들 속에 파묻혀 있었어. 몇 개월 간 사람이 많지 않은 시골에서 내 마음대로 두 팔 두 발 다 뻗으며 지냈기 때문에 처음에는 바로 옆에 붙어 있는 그들의 인기척이 거슬리더라고. 크게 신경을 쓰지 않으려고 노력했어. 혼자가 익숙하면 사람들이 어색하고 반대면 또 혼자가 낯선 게 당연한 거잖아. 징징거리는 감정이 올라올 땐 무심한 게 답이더라고. 대신 영화에 집중했어. 영화는 홋카이도를 배경으로 하고 있었지. 1999년에 개봉된 20년도 넘은 영화인데 며칠 전까지 내가 있었던 일본과 거의 비슷했어. 주인공이 입고 있는 교복이며 타고 다니던 자전거, 그리고 감기에 걸려 며칠 누워 있던 침대까지 눈에 익은 게 많더라. 덕분에 정신없이 영화에 집중할 수 있었어.
영화의 재미를 나만 느낀 건 아닌 듯했어. 2시간 동안 야외 상영장은 마치 아무도 없이 영화만 덩그러니 틀어놓은 듯 조용했으니까 말이야. 다들 나만큼 집중하고 있는 게 틀림없었어. 설산을 향해 "오갱끼데스카!(잘 지내고 있나요?)"라고 외치는 장면이 나왔어. 영화를 보지 않았을 때에도 매체를 통해 여러 번 접했던 부분이었는데 전체 스토리 속에서 다시 보니 더 인상적이더라고. 연인의 죽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며 과거에 갇혀 있던 주인공이 현재로 돌아오는 장면이었거든. 탁 트인 산 앞에서 주인공의 마음도 뻥 뚫리고 있었어.
영화가 끝으로 갈수록 주인공이 점점 편안해지는 걸 느꼈어. 나도 영화의 흐름에 따라 덩달아 차분해졌지. 덕분에 낯설었던 주변 사람들도 친근하게 느껴지더라고. '영화 잘 보고 있나요?' 조금만 더 같이 있었다면 영화의 여운까지 더해져 옆 사람에게 말을 걸 뻔했다니까. 분위기에 취해 제멋대로 나오려는 오지랖을 겨우 붙잡고 자리에서 일어났어. 그리고 혼자서 킥킥거렸지. 사람들과 함께 있는 걸 부담스러워하는 성격이라 생각했었는데 무리 속에서 내가 너무 편안해하는 게 웃겼어. 내가 아직도 나를 모르나 보다 했어.
불행히도 아련한 영화의 느낌을 집까지 가지고 가는 건 도시 사람들에겐 허용되지 않는 사치였어. 주차장은 상영장보다 더 빽빽했으니까. 심각한 변비 환자 같았지. 나는 혹시 앞 차에 운전자가 없는 건 아닌지 다시 살펴야 했어. 움직임이 전혀 없어 벽처럼 느껴졌었거든. 같은 변비 환자인 나는 미동도 없는 차속에서 이중의 답답함을 느꼈어. 그래서 더는 앉아 있질 못하고 주변을 살펴보겠다는 핑계로 차에서 내렸지. 다른 차 속에 있는 사람들의 표정도 나만큼 막혀 있었어.
잘 모이고 헤어지는 게 말처럼 쉬운 건 아니구나. 조금 전까지 한 곳에 모여 함께 영화를 본 인연들이니 헤어질 때도 유연했으면 좋겠는데 현실은 그렇지 않았어. 하긴, 한 번도 본 적 없는 사람들끼리 무언의 룰을 지키며 순간을 잘 보낸 게 더 놀라운 일 아니겠어. 모일 때만큼 헤어질 때도 잘하면 좋겠지만 둘 중 하나라도 만족한 게 어디야. 어쩌면 막힌 차들의 모습이 더 자연스러운 것일 수 있겠다 생각하니 답답함이 조금은 가시는 듯했어.
계속 앞을 걷고 있는데 멀리서 차들이 하나씩 주차장을 빠져나가는 게 보였어. 무슨 이윤진 모르겠지만 뚫린 느낌이 났지. 모로 가도 서울만 가면 되는 거잖아. 그래서 나는 더 나가지 않고 다시 차로 돌아왔어. 그리고 곧 움직일 거란 기쁜 소식을 전했지. 가만히 못 있고 고삐 풀린 망아지같이 구는 내가 웃겼는지 엄마와 언니가 날 보며 웃었어. 나도 뚫린 해방감이 좋아 따라 웃었지. 그리고 우리는 천천히 움직이는 차 안에서 영화 이야기에 집중했어. 막힌 것에 신경을 쓰지 않으니 오히려 더 잘 뚫리는 듯하더라. 나도 영화 속 주인공처럼 잘 헤어지는 법을 배우고 있는 중이었어.
도시 생활은 하루에도 몇 번씩 모였다가 헤어지고를 반복하는 것 같아. 그러다 보니 생각보다 성가신 일도 많고 말이야. 커피 하나를 사려해도 줄 서서 기다려야 하니까. 사람 많은 곳에서 생활하는 건 참 오랜만이야. 나는 여전히 조용한 시골 생활이 좋지만 가족들이 도시에 있으니 함께하는 동안에는 내가 이곳에 맞춰 살아야 하지 않겠어. 부디 매일 헤쳐 모이는 삶에서 몸과 마음이 너무 뻣뻣하지 않을 수 있길. 그래서 가족과의 한달살이에서도 무사히 살아남길 바라.
대문 사진 : 픽사베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