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무새를 키우는 애조인들이 포도나무를 예쁘게 다듬어 앵무새 횃대로 사용하는 모습을 보았다. 구불구불한 자태가 고풍스러우면서도 인테리어 효과까지 있어 멋있어 보였다.
<앵무새 정보밴드 회원님들이 만든 포도나무 횃대>
포도나무는 가로로 길게 자라고 적당하게 구불구불해서 앵무새 횃대 놀이터로 적합하다. 우리 앵순이에게도 이 정도는 해줘야지 싶어 남편과 포도나무를 사러 돌아다녔다. 첫 번째로 찾아간 곳은 유목을 쌓아놓고 파는 창신동 수족관 거리였다. 썩지 않는 유목들이 가게 문 밖에 많이 쌓여 있었지만, 나무의 수형이 앵무새에게 맞지 않거나 작은 것들 위주로 있었다. 여러 곳을 다녀보았지만, 가격만 비싸고 모양이 마음에 들지 않아 구매를 포기했다.
몇 달이 지나 엄마가 가장 좋아하는 핫플레이스인 양재꽃도매 시장을 구경차 방문했다가 우연히 포도나무 묘목을 발견했다. '그래! 죽어서 다듬어져 있는 나무보다 살아있는 나무가 더 친환경적이지!' 싶어 빠른 의사결정을 내려 냉큼 샤인 머스캣 포도 묘목을 사 왔다. (화분이나 꽃 사는 거 싫어하는 아빠도 앵순이를 위해서는 구매에 찬성함.)
남편의 쓸모^^ 생각보다 나무가 무거웠다
나무에 맞는 흙과 화분도 필요해서 또다시 여러 가게를 돌아다니며 적당한 화분과 흙을 구매했다.포도나무 묘목이 가로로 긴 형태라 승용차 뒷좌석에 창문까지 열고 겨우 실어서 집으로 왔다.
가장 아래쪽은 난석을 깔아 물 빠짐을 좋게 하고 나무를 적당한 위치에 심기 위해 온 가족이 도와주었다. 나무가 생각보다 무겁고 화분도 커서 흙으로 채우고 나니 혼자서는 옮기기 어려울 만큼 무거운 화분이 되었다. 좁은 집 거실에 생뚱맞게 포도나무가 한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앵순이가 횃대에 앉아 자유롭게 움직이며 부리도 갈고 밥도 먹는 그림과 같은 평화로운 장면을 보기 위해 하루 종일 움직였다. 몸은 힘들었지만, 마음은 뿌듯하다. 앵순이 밥그릇과 물그릇도 적당한 위치에 달아 주었다. 포도나무 횃대 완성!
"앵순이의 러브 하우스를 소개합니다. 짝짝짝!"
건물 개소식하듯 주인공 앵순이를 입장시킨다.
인생은 마음대로 전개되지 않는다고 하지 않던가. 반전 상황을 마주하게 된다. 앵순이가 포도나무 횃대가 무서운지 앉아 있지 않고 기겁하며 도망가 버리는 것이다. 앙상한 가지만 을씨년스럽게 있어서 첫인상이 안 좋았던 것인지 포도나무 횃대 놀이터에 앉아 있기조차 완강히 거부한다.
앵순이를 위해 한 행동인데 정작 당사자는 싫다고 한다. 공든 탑이 무너지는 순간이다. 앵무새의 습성을 이해하지 못한 인간의 자만이었던 것일까?
모든 사람은 자신의 이해 정도와 인식의 한계 내에서만 세상을 바라볼 뿐이다. <쇼펜하우어>
앵순이가 거부하는 이유를 역지사지의 자세로 생각하며 화려한 장난감을 달아보기도 하고, 발에 닿는 촉감을 부드럽게 하기 위해 가죽끈으로 나무를 감아주기도 했다. 그런데도 절대로 앉지 않겠다는 행동을 보인다. 심지어 나무가 있는 창 쪽은 눈길도 주지 않는다.
그렇게 샤인머스캣 포도나무는 횃대가 아닌 반려 식물로 우리 가족과 함께 살게 되었다. 봄이 되니 나무 피부를 뚫고 초록색 생명이 움직인다. 햇볕이 많이 들지 않는 척박한 환경임에도 생명력은 대단했다. 줄기가 나오고 잎이 나오고 포슬포슬한 포도꽃이 폭죽처럼 터져 나온다. 살면서 포도를 먹을 줄만 알았지. 포도꽃은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는데 처음 보는 포도꽃은 화려하지 않고 소박한 모습이어서 더 놀랐다. 꽃이라고 하기에는 존재감이 없었다. 실핏줄 같았다.
존재감 없는 이 꽃들이 달콤하고 큼직한 포도알이 된다니 그저 신기할 따름이다. 꽃이 여기저기 피었지만 키우기 힘든 환경임을 눈치채고 나무 스스로 한 송이만 남겨 놓고 나머지 포도꽃들은 저절로 말라 떨어졌다. 깊은 흙에 뿌리내리게 해주지 못한 것과 햇빛을 많이 보게 해 줄 수 없는 환경에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무럭무럭 5개월 동안 자라 포도 알맹이가 눈에 보이기 시작한다. 포도나무는 앵순이 덕분에 오히려 전화위복이 되었을까? 앵무새가 횃대로 이용했다면 싹이 나올 때마다 부리 공격을 받았을 텐데 앵순이가 싫어한 덕분에 이렇게 열매까지 맺게 되었다.
포도 알맹이에 기름을 발라 놓은 것처럼 광택이 난다. 듬성듬성 열렸지만, 집 베란다에서 샤인머스캣 포도를 재배해 본 사람이 얼마나 될까? 이 또한 특별한 경험이었다.
다시 반전인 것은 앵순이가 이 열매를 너무 맛있게 먹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포도 포도'라고 하면 포도를 준다는 말로알아듣는 것 같다. 쪼르르 날아와서 빨리 달라고 보챈다. 하루에 한 알씩 산지 직송으로 따서 세상에서 가장 신선할 때 먹는다. 무농약 포도를 매일 간식으로 한 달가량 먹었다. 포도 횃대보다 포도 먹방을 좋아하는 앵순이의 모습을 발견했다. 이제 매년 8~9월이 되면 싱싱한 샤인머스캣 포도 간식을 먹을 수 있을 것이다.
인생에서 가장 강렬하고 놀라운 사건은 대부분 사랑이라는 감정에 의해 만들어진다. <쇼펜하우어>
반려 동물을 사랑해서 시작한 행위가 의도한 대로 흘러가지는 않았지만, 이 또한 좋은 결말로 끝났다.
1년을 기다려 알게 된 사물의 또 다른 쓰임과 가치! 어떤 가치는 대기만성형처럼 늦게 그 쓸모가 발견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