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한 바퀴_대서양 로드트립 20
체서피크 베이 브리지-터널은 델마바 반도(Delmarva Peninsula)와 버지니아 비치를 연결하며 체서피크만을 횡단한다. 델마바반도의 케이프 찰스(Cape Charles)에서 시작해 대서양 건너 버지니아주 노포크 (Norfolk) 근처까지 이어진다. 델마바 반도에서 뉴저지 주 남부에 자리한, 3개 주, 델라웨어주. 메릴랜드주. 버지니아주 (DE.MA.VA)가 함께 만난다.
이 브리지 터널은 바다 위와 아래를 가로지르는 37km 길이의 건설 토목 공학 걸작품 (engineering marvel)이다. 시속 90km 속도의 자동차로 이동해도 편도 40분 정도가 소요된다. 이 구조물은 바다 위 교량과 바다 아래 터널을 결합한 세계적 희귀 사례다.
운전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라도 이 길을 달리며 잊지 못할 경험을 할 수 있다. 바다 위로 낮게 뻗은 다리를 달리는 동안, 머리 위로 갈매기가 날고, 수평선은 끝없이 이어진다. 그러다가 도로는 갑자기 바닷속으로 잠수해 바다 밑 터널 속을 달린다. 그러다 다시 지상으로 솟아오르면 다리가 이어지고 바다와 하늘이 교차한다.
| 왜 다리와 터널이 함께 있을까
1950년대까지 이 지역을 연결하는 유일한 수단은 페리였지만 배는 안개와 폭풍에 자주 멈췄다. 두 지역을 연결하는 교량 건설도 계획했지만 두 가지 이유 때문에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첫째, 교량-도로 남쪽 끝인 버지니아 비치 근처 노퍽 (Norfolk)에 세계 최대 미군 해군기지가 자리하고 있어서, 미 해군은 자유로운 항로 확보를 강력히 요구했기 때문이었다. 둘째, 바다의 깊이가 불규칙하여 다리 건설을 위한 기초 공사도 거의 불가능한 지역이 많았다. 타협안으로 공사가 가능한 지역에는 교량을 건설하고, 미해군함이 지나는 항로와 교량 공사가 불가능한 지역에는 해저터널을 뚫었다.
| 희생과 건설
1960년 공사가 시작되었고 2천 명이 넘는 인부들이 동원되었다. 1962년 3월, 애쉬 웬즈데이
(Ash Wednesday) 폭풍이 공사장을 덮쳐 이미 완공된 교량 1마일을 쓸어가 버렸다. 장비와 바지선이 가라앉았고, 일부 노동자는 돌아오지 못했다.
해저터널도 난공사의 연속이었다. 해저 길이 90미터, 수만 톤에 달하는 콘크리트 도랑을 하나씩 가라앉혀 연결했다. 잠수부들은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조류에 휩쓸리며 볼트를 조이고 틈새를 메웠다. 바닷속 공사는 조금의 오차도 허용하지 않았다. 여러 노동자가 목숨을 잃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64년, 길은 완공되었다.
| 경제적 성과: 고립에서 연결로
총공사 비용은 2억 달러 (약 2천7백억 원). 연방정부의 지원은 전혀 없었고, 전액을 통행료 채권으로 충당했다. 무모한 도전처럼 보였지만, 몇 년 만에 채권은 조기 상환되었고 수익을 내기 시작했다. 효과는 고무적이었다.
고립되었던 버지니아 동부 해안은 시장과 미국 북동부와 연결되었다. 또한 미 해군은 안전한 항로를 확보했고, 이는 돈으로 환산하기 힘든 전략적 자산이었다. 농산물 등 화물은 빠르게 운송되었고, 수산업도 활기를 띠었다. 교량-터널 자체가 관광지가 되어 여행객이 몰려들었다. 이 길은 현재 연간 400만 대 이상의 차량이 통행하며, 약 6천만~7천만 달러 (약 800-900억 원)의 통행료 수익을 낸다.
이 길은 단순히 두 해안을 연결한 것이 아니라, 두 지역을 미래와 연결한 셈이다. 올바른 연결은 놀라운 혜택을 창출한다. 세상에는 통해야 하는데 지금도 막혀있는 곳들이 너무 많다. 한반도가 그렇다. 빠른 통일이 힘들다면 경제적이고 인도적인 연결이라도 시작했으면 좋겠다. 그리되면 우리 모두에게 놀라운 혜택을 줄 것이라 확신한다.
오늘의 이 교량-터널은 바다를 건너는 길에 그치지 않는다. 그것은 집념과 희생으로 쌓아 올린, 경제적 도약과 인간 의지의 결실을 체험하게 하는 거대한 증언이자 희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