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한 바퀴_대서양 로드트립 21
바다 위를 달리다가 잠시 바닷속으로 숨어들었다가, 다시 햇살 가득한 수면 위로 올라가며 체서픽 교량-터널을 지났다. 멀리 노퍽 (Norfolk)이 시야에 들어왔다. 수십 척의 회색 전함, 거대한 항공모함의 실루엣, 부두에 도열한 구축함들이 바다의 질서를 지키는 장벽처럼 서 있었다. 세계 최대의 해군기지답게, 그 풍경은 위압적이다. 기지 내부는 출입과 촬영 금지 구역이지만, 일 년에 한 번 정도 (보통 10월)에 기지 개방 행사가 있고 버스투어를 하면서 일부 구역과 전함에 대해 촬영이 가능하다. 아래 사진은 투어를 하며 직접 찍었다.
노퍽 기지 시작은 제1차 세계대기(1917년)로 거슬러 올라간다. 세계에서 가장 큰 해군기지이며 대서양 함대(Atlantic Fleet, 현 Fleet Forces Command)의 핵심 거점이다. 수십 척의 항모·구축함·상륙함·보급함과 잠수함이 집결할 수 있는 넓은 수역과 부두·지원 인프라를 갖추고 있어 대서양·지중해·북대서양 작전의 전진기지 역할을 해 왔다. 이 때문에 미군의 해상전투와 보급·정비·훈련의 핵심 허브로서 전략적 가치가 매우 높다.
| 천조국과 전쟁 억제
미국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세계의 경찰 역할을 주도해 왔다. 물론 자신들에게 이익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세계 경찰 역할은 막강한 군사력 때문에 가능했다. 미국은 세계 최대의 국방예산을 운영한다. 달러로는 8,900억 달러 한국 돈으로 거의 천조에 달해 별명이 천조국이다. 두 번째로 국방 에산을 많이 쓰는 국가는 중국이지만 미국 예산의 3분의 1 수준이다.
그러나 전쟁을 억제하는 가장 큰 무기는 핵무기다. 미국과 러시아를 포함한 핵 보유국 (미국, 러시아등 9개국)이 갖고 있는 핵무기는 전 세계를 몇 번이나 멸망시키고도 남을 정도지만 핵무기를 서로 없애거나 줄이지 못한다. 내가 적 보다 강력한 무기를 많이 가지고 있으면 적이 나를 건드리지 못할 것이라는 억지이론(抑止理論, Deterrence theory) 때문이다. 언제라도 핵전쟁의 위험이 있지만 핵보유국들은 핵무기 보유를 포기할 생각이 없다. 더구나 인류는 1945년에 두 번 일본에 실제로 핵무기를 사용한 경험이 있다.
핵무기를 보유한 국가들이 항상 겪을 수밖에 없는 갈등과 위기는 핵 잠수함 영화 Crisom Tide (1995)에서 핵무기를 쓸 수도 있다는 램지 함장과 신중해야 한다는 헌터 부함장의 대화에서 잘 나타난다.
Ramsey: "War is a continuation of politics by other means." Von Clausewitz.
Hunter: Yes the purpose of war is to serve a political end but the true nature of war is to serve itself. I just think that in the nuclear world the true enemy can't be destroyed. In the nuclear world, the true enemy is war itself.
램지 함장: 클라우스비츠 (19세기 철학자, 전쟁론의 저자)에 따르면 전쟁은 정치를 영속시키는 수단이네.
헌터 부함장: 예 전쟁의 목적은 정치 수단의 달성이지만 전쟁은 결국 전쟁 자체로서 존재합니다. 핵전쟁 시대에 진정한 적은 파괴할 수 없습니다. 핵전쟁 시대에 전쟁의 진정한 적은 전쟁 자체입니다.
| 그래도 무기는 많을수록 좋아
핵무기를 가진 국가가 많아졌으니 서로 무서워 전쟁은 절대 나지 않을 것 같고 군사비 지출은 줄어들 것 같은데 현실은 정반대다. 오늘날에도 재래식 군사력 유지에 막대한 국방비를 쓰는 국가들의 논리는 이렇다. 핵무기는 궁극적 억지 수단이지만 실제 사용은 쉽지 않기에, 국가가 매일 국제 분쟁과 안보 문제에 개입하고 영향력을 행사하는 데에는 재래식 전력이 필수적이라는 것이다.
현재 전 세계 국방비는 약 2조 4천억 달러 (3,240조 원)에 달하는데, 만약 각국이 이를 10%만 줄인다면 매년 약 2,400억 달러 (324조 원)가 절감된다. 이 돈은 유엔이 제시한 연간 400억 달러 규모의 기아 종식 예산을 충당하고도 남으며, 모든 인류에게 깨끗한 물과 위생을 보장하고(연 150억 달러), 세계 모든 아동에게 초등교육을 제공하며(연 300~400억 달러), 저개발국의 보건 체계를 강화하는 데 충분하다.
군사력은 평화의 한 수단이지 전부가 아니다. 지속 가능한 평화는 인간들의 이성을 갖고 외교·경제·제도적 해법을 계속 시도할 때 가능하다. 전 세계 국방비를 10%만 줄일 수는 없을까? 엄청난 규모의 군사기지를 보며 든 생각이다. 기도 한 번 해보아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