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줄거리를 살지 않아

by 참읽기



강화도 가는 길, 운전이 길어졌어. 너와 동생이 잠든 사이, 엄마는 오디오북을 찾았어. 『빨간머리 앤』. 잠에서 깬 네가 물었지.
“이건 무슨 책이야?”
그날 이후 우리는 차만 타면 『빨간머리 앤』을 들었어.

시작은 그보다 더 전이었어. 늘 책을 끼고 사는 이모가 전자책이 쓸 만하다 했을 때, 엄마는 옳다구나 하고 붙잡았어.

휴대폰으로 책을 보는 건 쉽지 않았어. 두 살배기 네 동생을 곁에 두고, 휴대폰을 들여다보니 죄책감이 밀려왔거든. ‘이건 아니다’ 싶을 때, 옆에 작은 탭이 보였어. 오디오북. 귀에 꽂으니 들려왔어 — 책이.

자주 들었어. 설거지하며, 유모차를 밀고 하염없이 걸으며, 놀이터에서 멍하며. 잦은 이사로 동네에 친구가 없던 시절이었는데, 오디오북 덕분에 엄마는 덜 외로웠어.

오디오북을 끼고 생활하는 시간이 길어졌어. 금방 끝나면 허전함이 몰려왔지. 오래 머무를 이야기가 필요했어. 목마른 사람처럼 7시간, 9시간, 11시간짜리 오디오북을 찾았어. 자연스레 고전문학 코너에 닿았어. ‘고전문학은 뭘 골라도 괜찮겠다’라는 막연한 확신으로 그동안 읽지 못했던 이름들을 마구 클릭했어.

책이 길수록 줄거리는 흩어지고 사람의 삶이 보였어. 우리는 줄거리를 말하지만, 실제 사람은 줄거리를 살지 않아. 순간을 살뿐이지. 긴 고전 속 등장인물들은 희망 없어도 쉽게 포기하지 않았어. 살기 위해 하나를 하고, 다음 하나를 하고, 그다음 하나를 했어. 작은 하나들이 이어져 거대한 가능성이 되고, 결국 불가능하던 희망이 현실이 되더라.

엄마는 마음속으로 자꾸 물었어. 어떻게 그렇게 사느냐고. 그러면 그들의 목소리가 속삭이는 듯했어.
"오늘은 오늘의 친절을 베풀고, 내일은 내일의 친절을 베푼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순간 속에 정성을 다해 사는 것뿐이다."

엄마는 닮고 싶었어. 낱말 같은 하루를 성실하게 모아 단어 같은 줄기를 만들고, 단어를 모아 문장 같은 거대한 흐름을 만들어내는 삶을.

‘나의 아이도 그처럼 살면 좋겠다.’

네가 열 살이 된 해부터 엄마는 너와 고전을 읽기 시작했어. 일주일에 한 번, 멋진 카페에 앉아 좋아하는 음료를 주문하고 함께 책을 읽고 이야기를 나누어.

『빨간머리 앤』, 『작은 아씨들』, 『폴리애나』, 『비밀의 화원』, 『마틸다』, 『걸리버 여행기』, 『피터 팬』.

엄마는 너와 정서적 유대를 길게 이어가고 싶었어. 읽기 독립을 한 뒤에도, 아직은 엄마가 읽어줘야 더 재미있는 책을 하나쯤 남겨두어야지. 우리끼리 문장으로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너와 읽으며 나눈 대화가 쌓여갈수록 엄마의 어깨는 더 무거워져. 네가 고전 속 인물들의 삶에 눈을 떴거든. 엄마는 생각해. '여태까지 어떻게 살아왔는지'보다 '지금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보여줘야 한다고.

문장 속에 담긴 삶의 자세가 너와 나의 언어 속에 고요히 스며들기를 소망해.

화요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