빨간머리 앤
"I don’t want to be anyone but myself."
수하야,
날은 춥지만 반짝 해가 난 오후였어. 호수 공원을 걸었지. 백로 두 마리가 우아하게 날개를 펴고 내려앉았어. 한 마리는 크고, 한 마리는 작았지. 너는 속도를 낮추고 살금살금 다가갔어. 새들은 도망가지 않았어. 서로 아끼는 듯 보였지.
"엄마와 아가일까?"
근처 카페에 들어갔어. 춥지 않다고 생각했는데, 실내에 들어가니 따뜻한 걸 마시고 싶었어. 나는 아메리카노, 너는 스팀우유를 주문했어.
"너랑 나랑 고전을 함께 읽고 대화하는 북클럽 해보는 거 어때?"
따뜻한 음료를 한 모금 마시며 네게 물었어. 고전이 무엇인지 소개했어. 『삐삐롱스타킹』, 『메리 포핀스』, 『크리스마스 캐럴』, 『오즈의 마법사』 등 이미 읽은 게 꽤 있다는 얘기도 하면서.
“지난주에 우리 『빨간머리 앤』 오디오북 다 들었잖아. 그 책부터 해보는 건 어때? 이미 다 읽었잖아. 우리에게 소중한 책이니까. ”
“응, 좋아!”
네가 배시시 웃었어.
첫 북클럽 날이 왔어.
“책에 나온 등장인물 중에 누가 제일 너랑 닮았다고 생각해?”
“나는 앤과 다이애나가 섞여 있는 거 같아!”
그러고 보니 수하랑 앤은 정말 닮았네.
“나도 마릴라 아줌마와 매슈 아저씨가 섞여 있는 것 같은데! 내가 마릴라 아줌마처럼 지킬 건 지켜야 한다고 생각하거든. 하지만 너를 대할 때는, 그러니까, 한없이 많은 걸 해주고 싶어”
“너그러움?”
그래, 그 말이야. 매슈 아저씨처럼 너를 사랑하고 싶거든.
앤이 샬럿타운의 호텔에서 시 낭송을 했어. 화려한 사람들에 둘러싸여 처음에는 기가 죽었지. 앤이 결국 얼마나 잘했는지 기억나지? 돌아오는 길에 앤이 한 말이 내 마음속에 오래도록 남았어.
“나는 진주 목걸이를 건 초록지붕집의 앤으로 충분히 만족스러워. 분홍색 옷을 입은 노인의 보석에 결코 뒤지지 않는 사랑을 매슈 아저씨가 이 목걸이에 담아주셨다는 걸 알거든.”
― 『초록지붕집의 앤』, 루시 모드 몽고메리, 현대지성
매슈 아저씨가 자녀같이 사랑하는 아이는 세상에 앤 하나뿐이지. 앤은 알았어. 매슈 아저씨의 단 하나뿐인 사랑을 받고 있다는 걸. 그래서 고백해. 누구의 삶도 부럽지 않고, 누구와도 바꾸고 싶지도 않다고. 사랑받고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였을 때 비로소 자신으로 설 수 있었어.
앤이 '상상하고 있다'는 말을 자주 하지. 앤을 만나고부터 네가 마음껏 상상하는 게 보였어. 앤이 너의 마음을 많이 이해해 주고 용기를 주는 게 기쁘더라. 앤의 상상은 처음에는 엉뚱해 보였지만 결국 스스로를 사랑하게 된 방식이기도 해. 너도 상상을 통해 너 자신에게 더 가까워지는 중이겠지.
"가장 마음에 드는 문장이 뭐였어? “
마무리하며 질문했어. 너는 한참 다시 책을 살펴보더니 말했어.
"모퉁이를 돌면 무엇이 있을지 모르죠."
"왜?"
"앤이 레드먼드 대학에 갈 수 있었는데도, 마릴라 아주머니를 위해서 양보했어. 길모퉁이를 돈 거지. 조금만 계획을 바꿔본 게 참 대단하다고 생각해."
앤은 자신이 사랑받는다는 확신이 있기에 사랑을 돌려줄 수도 있게 되었어. 그런데 언제부터 이걸 알았을까?
29장의 제목이 <인생의 한 획을 그은 시간>이야. 배리 할머니가 물었어. 도시에서 살고 싶냐고.
"저는 도시 생활에 맞지 않고, 그래서 다행이라고 결론 내렸어요. 어쩌다 한 번씩 밤 11시에 멋진 식당에서 아이스크림을 먹는 일은 참 멋져요. 하지만 보통 때라면 밤 11시에는 동쪽 다락방에 있는 게 더 좋아요."
『초록지붕집의 앤』, 루시 모드 몽고메리, 현대지성
앤에게 인생의 한 획을 그은 사건이란 “나의 집”이 생긴 거야. 그동안은 초록지붕 집을 “나의 집”으로 여긴 건 아니었어. 여행 나와 있으면서 앤은 초록지붕 집이 “나의 집”이라는 걸 깨달아. 안정감을 가지게 되었지.
여행 이전에 앤은 뿌리 없는 나무 같았어. 제대로 서 있을 수 있겠니? 계속 사고를 치고 지냈지. 여행 이후부터 앤은 달라져. 대지에 깊이 뿌리를 내리고 성장만 아는 나무처럼 쑥쑥 자라나. 앤은 “나의 집”에서 사랑받으며 비로소 자기 자신이 될 수 있었어. 수하도 우리 가정 안에서 사랑받으며 너 자신으로 있을 수 있으면 좋겠다.
네가 어느 순간 앤을 언니라고 부르고 싶다고 했지? 그 말을 들었을 때 엄마는 네가 앤과 함께 자라고 있다는 걸 느꼈어. 책 속에서 좋은 친구이자 언니이자 선생님을 만난 거야. “나의 집”이 생긴 앤이 자라듯 수하도 책 속의 좋은 언니를 만나 쑥쑥 자라날 거라 믿어.
엄마도 너의 사랑을 받는 이 자리에 있다는 게 정말 소중해. 누구의 삶도 부럽지 않고, 누구와도 바꾸고 싶지 않아. 엄마는 네가 만들어준 초록색 하트 펜던트를 가방에 넣어 가지고 다니는 나로 충분히 만족스러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