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에겐 큰 언니이자 곧 엄마 그 자체였던 큰 이모님이 소천하셨다.
엄마는 늘 걱정이 많은 편이다.
본인으로 인해 누군가에게 폐를 끼칠 것 같으면,
특히나 신경을 쓰는 편인데 그로 인해 나 역시 어릴 적부터 남에게 실례가 되거나
남에게 책잡힐만한 행동이나 말은 하지 않도록 교육받았다.
애매하게 일하는 것도 싫고,
확실하게 1인분을 하되,
하던 일에 완벽을 기울이지 못한다면,
끝끝내 미련이 남아 마음이 괴로운 사람이
바로 ‘엄마’였다.
그래서였을까?
엄마는 유독 없는 살림에도
보험을 많이 가입하셨다.
타먹지도 못할 보험에
왜 그렇게 많은 돈을 붓는지
아직도 이해는 안 가지만,
엄마는 혹여라도 자식들에게 부담이 될까 싶어
이것저것 쪼끔씩 가입해 두었노라며
‘이제 더 이상 들 보험도. 돈도 없다.’면서
싱긋 웃으신다.
많은 종류의 보험을 들었고,
실제 더 가입할 돈도 없는 게 확실하다.
엄마는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딴 이후로
요양병원에서 일하고 계신다.
물론 요양병원의 요양보호사가 아닌
급식보조로.
언뜻 이해가 안 되는 업무지원인데.
본인은 이런 일이 오히려 마음이 편하다고 하신다.
무슨 일을 하던지 기본부터 제대로 차근차근 배워야 한다는
뚜렷한 철학 때문인지 몰라도 사서 고생을 하시는 것 같아 보여
이제 그만 요양보호 일을 해보시라고 해도
‘엄두가 나질 않는다.’는 말로 대신하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던 중 큰 이모가 치매증상이 점점 심해져
엄마가 있는 요양병원으로 옮기게 되었다.
그동안 따로 살다 보니 왕래를 할 기회가 없었다가
병이 심해진 후에야 엄마의 보살핌을 받을 수 있는
기회가 생긴 것이다.
엄마 말에 따르면, 치매에는 착한 치매와 나쁜 치매.
두 가지 종류의 치매가 있다고 하는데
이모가 걸린 치매는 ‘나쁜 치매’
나쁜 치매는 밤늦게 새벽까지 잠을 자지 않고
울부짖거나 같이 동거하는 사람이 쉬지 못하도록
새벽까지 힘들게 하는 특징이 있다.
그리고 환자 본인은 그걸 기억하지 못한다는 것.
이 외에도 다른 증상들이 있겠지만,
간병인을 힘들게 하는 치매냐 아니냐의 차이가
아마도 착한 치매와 나쁜 치매를 나누는 기준이 아닐까 싶다.
아무튼 이모는 요양병원에 계시는 동안에도
간병인이 자신을 괴롭힌다.
밥을 주지 않아 배가 고파 죽겠다.
동생아. 나를 제발 좀 여기서 나가게 해 다오.
저 사람들이 내 돈을 훔쳐갔다.
간병인이 나를 때렸다. 등등
본인의 안타까운(?) 사정을 토로하며,
눈물로 호소하기도 하고, 성을 내기도 한다고 했다.
엄마와 가끔 전화통화를 하면서
요양병원의 환자들의 식단이 모두 달라
그에 맞춰서 매끼 준비를 하는 일이 너무 힘들다는
이야기를 들을 때에는 그냥 힘들겠다 싶었는데
막상 치매환자인 언니를 대하는 기회가 많아지다 보니
일이 끝난 후에는 늘 언니의 곁에서 언니와 말동무를 하며,
몸도 만져주며 마사지하다 보니 몸이 정말 힘들다는 이야기를 하셨다.
엄마는 어지간하면 ‘힘들다’는 말을 정말 하지 않는 편이었는데
요양병원에서 처음 일했던 6개월 동안은 힘들다는 말을 입에 달고 있었고,
큰 이모가 전원 하면서 함께 지낼 때에는 매번 전화할 때마다
‘힘들다’는 말씀을 많이 하셨다.
생각해 보니 요양병원의 수백 명의 식사를 책임지기 위해서는
그 뜨거운 국솥과 밥솥 수십 개가 환풍기에 의존해
김이 뿜어져 나올 것이고, 전쟁 같은 조리공간에서
하루종일 땀으로 샤워했을 엄마의 모습을 상상해 보니
건장한 남자여도 저 일을 할 수 있을까? 란 생각이 들었다.
늙더라도 내 힘이 있고,
내가 돈을 벌 수 있는 능력이 있는데
자식들이 번 돈으로 어떻게 호의호식할 수 있겠냐는
‘큰 어른’의 생각이 지금의 엄마를 버티게 해주는 것이 아닐까 싶다.
자식에게는 걸림돌이 되기 싫고,
부담주기 싫은 그 마음.
새삼 엄마가 더 대단한 사람이라는 걸 생각하게 된다.
나 역시 직장생활을 15년 가까이했음에도
엄마보다 더 잘할 자신은 없다.
큰 이모가 소천하시기 전,
엄마는 가장 먼저 큰 이모의 마지막 모습을 보셨다고 한다.
늘 마음 한편에 든든한 버팀목이었던 큰 언니였기에
더욱 애정이 넘쳤던 사이였는데
엄마는 큰 언니 덕분에 깡시골에서 도시로 나올 수 있었다며 회상했다.
자갈치시장에서 생선을 팔면서 먹고살만해지면서
시골에 있던 동생들을 모두 부산으로 불러 모아
살아갈 수 있는 터전을 제공하고,
일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다고 했다.
고등학생이었던 시골뜨기 여자 아이가
언니 덕분에 부산으로 진출하게 된 것이다.
(외할아버지는 고등학생이 되자 돌아가셨다.)
외할머니는 인천에 계신 오빠와 살림살이를 합쳤고,
나머지 형제들은 그렇게 큰 언니가 있는 부산으로
모이게 된 것이었다.
엄마의 엄마는 인천에 계시니 자주 볼 수 없었고,
큰 언니는 엄마와 나이차이가 별로 나지 않았으니
막내인 엄마에게 큰 언니는 그저 빛이요. 엄마였다.
어릴 적 나는 종종 외갓집 대용(?)으로
명절 마지막 날에는 큰 이모집으로 향했다.
그게 엄마의 친정이었고,
큰 이모는 아버지에게 장모와 다름없었다.
(실제 할머니와 큰 이모는 나이가 비슷하셨다.)
그렇게 엄마와 같던 큰 이모가
치매로 힘겨워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엄마도
계속되는 간병과 악화된 모습에 힘겨워할 때쯤
큰 이모는 마지막 숨을 내뱉으셨다고 한다.
엄마의 이름을 나직이 부르며,
“OO야. 고생 많았데이.” 하셨다는데
엄마는 이모의 손을 꼬옥 잡으셨다고 한다.
참 만감이 교차할 마지막 유언이었다.
엄마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며,
이모의 손을 부여잡으며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언니야. 미안하데이.
내가 좀 더 잘 못해줘서 미안하데이.
언니야. 이제 좋은 데가서 아프지 마레이.
언니야. 사랑한다. 고맙다 언니야.
고생했다. 언니야.
이제 우리 걱정은 하지 말고
언니야. 이제 형부 만나서
행복하게 지내레이.
참 애틋한 자매지간이다.
글을 쓰는 지금도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는
마음을 울리는 단어를 참 잘 쓰셨다는 생각이 든다.
엄마는 늘 필요 없는 말을 하지 않으려 애쓰는데
꼭 해야 할 말과 하고 싶었던 말을
마음속 깊은 곳에 꾹꾹 숨겨놓고 모아두었다가
한꺼번에 끄집어내는 재주(?)가 있으시다.
장례식장에 가서 나도 절을 하며 많이 울었다.
어릴 적 큰 이모는 만날 때마다
머리를 쓰다듬으며 만 원짜리를 꺼내어 주시면서
‘니는 엄마한테 잘해야 된다.’
‘니는 너희 엄마한테 잘해야 된다.’는 말을
수없이도 하셨다.
젊은 나이에 애 딸린 남자에게 시집가는 언니의 마음이 편치 않았을 것이다.
더구나 시부모가 서슬이 퍼렇고 고추보다 매운 시집살이에
힘들어도 힘들다고 내색하지 않을 동생에게
나라도 짐이 아닌 기쁨이 되어주길 바랐을 것이다.
이모의 바람대로 “엄마에게 잘하지는” 못하는 아들이지만,
누구보다 엄마에겐 친구 같은 아들,
딸과 같은 아들로 지냈다고 감히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장례식장에서도 밥 한 술 뜨지 못한 엄마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일일이 전화하며 문자를 하면서
사람들을 챙기고 모았다.
“역시 막내이모.ᐟ”라는 말이 사촌들의 입에서 나왔고,
나는 외가에서 엄마가 어떤 존재인지 또 한 번 알게 되었다.
정작 본인은 아무것도 못 먹었으면서
나에게는 ‘따스운 밥 먹으라’며 이것저것 챙겨주시는데
왠지 모를 따뜻한 무언가가 가슴을 데웠다.
‘그래. 이게 사랑이지.’
하면서 타지살이로 지친 나에게
뭔가 위로처럼 다가왔다.
나는 그동안 엄마의 손길, 엄마의 따뜻한 말이 그리웠나 보다.
문득 두려워졌다.
“만약 이제부터라도 엄마가 없으면 어떡하지?”
삶의 버팀목이라는
엄마라는 존재가 사라진 엄마에게
얼마나 두려울지 상상이 되자
나는 점점 조바심이 났다.
장례식장을 나서는 내 손을 잡으며
엄마는 빙그레 웃으며, 고맙다고 하셨다.
바쁜데도 하루를 꼬박 함께해 주었고,
아들들이 엄마한테 와줘서
너무 좋았다고 하셨다.
특히나 인천에 계신 외삼촌과 아들들이 함께
엄마 집에서 하룻밤 잤던 게 너무 좋았다고 하셨다.
나에게는 별거 아닌 일이었으나
엄마는 두고두고 고마웠고,
자식을 번듯하게 잘 키워서
내가 체면이 서서 좋았다는 말이었을 것이다.
다행이었다.
엄마의 마음이 잠시라도 좋은 일을 한 것이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