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때 대기업들을 중심으로 사무공간 개선 열풍이 불었다. 스마트워크라는 명분을 내걸고 어떤 기업은 공유오피스를 한다더라, 또 어디는 자율 좌석제를 한다더라, 집중 근무실을 만들었다더라, 대대적으로 공사한다더라...
실제로 일부 대기업들은 앞다퉈 사무공간을 요란하게 뜯어고쳤다. 돈 많은 회사들은 아예 새로운 사옥을 짓기도 했고 공유오피스를 건물채로 렌트하면서 떠들썩 했다. 수평적 문화를 만든답시고 파티션을 없애고 미팅룸을 투명한 통창으로 바꿨다. 구성원 휴게실에 안마기를 비치하고 게임기를 설치하고 다트판과 당구대를 들여놓는 일 정도로는 변화 축에도 못낄판. 대다수 중소기업 직장인들은 그 열풍을 지켜보며 부러움과 박탈감을 동시에 느꼈다.
그 효과를 체감하기도 전에 생각지도 못한 변수가 터졌다. 무려 3년 간 코로나라는 희대의 팬데믹이 온 나라를 덮치면서 재택근무라는 전혀 새로운 형태의 일하는 방식이 확산된 것이다. 이게 될까? 싶었던 회사밖 업무방식은 의외로 잘 먹혔다. 이렇게도 일이 되는구나 알게 됐다. 그 과정에서 자리만 지킬 뿐 별다른 역량도 딱히 쓸모도 없는 고인물들의 민낯도 수면 위로 드러났다. 어디에서 일하든, 어떻게 일하든 결과만 내면 그만이라는 ROWE(Result Only Working Environment)업무방식의 가능성이 여기저기에서 타진되었다.
미래학자나 경영학자, 자기 계발 강연자들은 앞으로 다시는 기존의 업무 방식으로 돌아가지 못할 것이라며 호언 장담했다. 그들의 말대로 재택근무라는 새로운 업무 방식이 완전히 정착 됐을까? 정반대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재택근무라는 업무방식혁신은 전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원상 복귀되었다. 올해 우리나라 재택근무 일자는 주요국 평균 수준에도 미치지 못한다.
문제는 그렇게 슬금슬금 회사로, 사무실로 복귀하게 된 직장인들의 업무 만족도가 썩 좋지 못하다는 데 있다. 이미 재택근무라는 새로운 근무형태를 접하며 일의 집중도와 효율이 언제 어디서 어떻게 최적화되는지 환경의 중요성에 대한 진실을 알아버렸지 않은가?
무엇보다 아침저녁 끔찍한 출퇴근에 시달리고, 꼴 보기 싫은 사람을 마주해야 하고, 불편한 회식 따위 강요된 인간관계의 스트레스가 만연한 '전쟁터'로 다시 돌아간다니. 그곳이 천상의 시설을 자랑한다 한들 무슨 소용일까? 실제 자율좌석제니 스마트오피스니 큰돈 들여 바꿔놓은 업무환경에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절반에 육박한다는 통계도 나온 마당. '잘 모르겠다'는 답까지 합하면 무려 70%를 넘는다.
사무공간 개선 열풍과 함께 우후죽순 늘어났던 공유오피스 기업들 역시 빨간불이다. 팬데믹이 종료되면서 매출면에서는 여전히 성장하고 있지만 그에 비해 이익률이 현저히 둔화되었다. 심지어 이 분야 세계적인 선도기업인 위워크의 파산 루머가 파다하다. 암만봐도 수년 전 대기업을 중심으로 불었던 사무환경 개선 열풍은 들인 돈과 품에 비하면 찻잔 속 태풍(돈ㅈㄹ)에 그친 모양새다.
[딥 워크]의 저자 칼 뉴포트는 "업무 공간을 여러 동료와 함께 쓰면 너무 산만해져 진지한 생각을 할 수 없다" 라며 개방형 사무공간의 문제점을 지적했다. 구성원들의 충분한 의사나 업무 스타일이 반영되지 않은 일방적 환경 개선에 일침을 가한 셈이다. 물론 인간은 무리를 지어 생활하는 사회적 동물인 만큼 대면근무의 장점 또한 명확하다. 책상거리가 6m 이내인 동료 간 유대감과 팀십이 강화되고 소통이 극대화된다는 '엘런커브'는 대면 업무의 필요성을 대변한다.
앨런커브, 책상 거리에 따른 소통활성화 정도 [최고의 팀은 무엇이 다른가] 다니엘 코일
칼뉴포트는 방음 처리된 개별 연구실과 공용공간이 연결된 거점 구조의 조화를 그 대안으로 제시하기도 했다. 종합해보면 업무를 위한 사무환경은 산만과 집중, 확산과 수렴의 작용이 균형있게 순환될 때 최적의 몰입과 동기부여를 이끌어낼 수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주목해야할 점은 이미 재택근무의 장점과 효용성을 체감한 다수의 직장인들에게 대면근무의 단점, 예컨대 지나친 수직적 구조라던지, 의미를 상실한 관행 따위 폐해가 명확히 보이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원래 그런가 보다 묻어 넘겼던 일들이 어? 이거 아닌 거 같은데? 다시 돌아보게 되는 계기로 작용하게 될 테니 말이다.
거점 오피스를 만들고 공유 오피스를 따로 두어 구성원들의 접근성을 높이고, 자율좌석제를 도입하고, 휴게 공간을 확충하는 물리적 환경 개선 노력 자체는 물론 반가운 소식이지만, 문제는 그뿐이라는 거다. 대대적인 환경개선을 추진했던 기업의 관련자들은 일과 환경이 어떻게 상호작용하는지 그 매커니즘을 알긴 했을까?
왜 그렇게 하는가? 실질적으로 구성원들이 일하고 몰입하는데 도움이 되는가?라는 본질에는 선뜻 yes라는 답이 나오지 않는다.
보여주기식 쇼잉이 되어선 곤란하다
요란했던 기업들의 사무공간 개선 열풍이 찻잔 속 태풍에 그친 첫 번째 이유는 그저 보여주기식으로 일관했기 때문이다. 마치 과시하듯 큰돈을 들여 멋들어지게 사무환경을 꾸미는 일이 혁신의 전부인 것으로 착각하지는 않았을까? 구성원들의 일하는 스타일, 소통 방식, 업무 처리 프로세스, 관계의 메커니즘 등 본질을 깊이 있게 들여다본 후 맞춤형 환경을 조성하겠다는 진정성에서 시작된 것이 아니라 그저 구글이나 애플, 메타 등 빅테크 기업들의 그것을 모방해 우리도 이렇게 한다 라는 쇼잉에서 비롯된 광풍이었을 가능성 말이다.
그 결과 실제 일하는 사람들의 반응은 반으로 갈렸다. 공유오피스, 자율 좌석제, 자율근무제 등 일하는 환경의 혁신에 열광하는 사람들도 있었고 반면 새롭게 변경된 방식이 자신의 성향과 맞지 않아 적응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생겼다. 특히나 개인성향이 강한 사람들은 프라이버시를 침해당해 오히려 일의 몰입에 방해된다고 불편함을 호소한다. 실제 일부기업의 자율좌석제는 사실상 고정좌석제로 회귀하면서 애초의 취지를 상실하기도 했다.
파티션을 없애고 투명한 미팅룸을 만들고 여기저기 인테리어를 멋들어지게 조성하는 일만으로는 조직의 케케묵은 소통과 관계의 문제들이 일거에 해결되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회사의 업무 공간은 소통, 충돌, 개별 집중이 모두 원활하게 일어나는 공간이어야 한다. 조직 내에 소통과 관계가 만들어지고 유지되는 물리적, 심리적 환경의 메커니즘을 이해하지도 못한 채 그저 겉모습만 흉내 내왔으니 본질은 사라지고 부작용만 남을 수밖에...
누군가의 실적용이 되어선 안된다
기업들의 보여주기식 뜯어고침이 횡행했던 또 다른 이유는 누군가의 '실적'이 되기 때문이다. 조직문화 혁신이라는 KPI의 확실한 성공지표로 이만한 치적이 또 있을까? 마치 연말만 되면 멀쩡한 도로를 파헤쳐 새 보도블록으로 교체하는 지자체의 전시행정처럼, '이거 했다'라는 실적용으로 들이밀기에 손색이 없다.
지나다니는 시민들의 불편이야 아랑곳 않고 피 같은 세금이 그런 쓸데없는 일에 낭비되고 있음이 사실상의 본질. 남은 예산을 몽땅 털어내야 다음 해 예산도 깎이지 않는다는 그들만의 합리적? 이유와 재선을 위해 그럴듯한 실적 쌓기용 치적을 남기려는 누군가의 사심이 결합된 블랙코미디가 아닐 수 없다.
연말이 다가오면 느닷없이 사무실 환경 개선이랍시고 레이아웃을 뒤바꾸는 기업의 일도 같은 맥락이다. 구성원의 의견이나 편의는 아랑곳 않고 연말 조직개편을 핑계로 멀쩡한 사무실을 뜯어내고 불필요한 공사를 강행한다. 인테리어 업체들 역시 눈먼 돈 들어오는 일에 마다할 이유가 없다. 신났다.
어떻게 하면 구성원들이 쾌적한 환경에서 방해요인 없이 몰두할 수 있을까? 창의적 아이디어와 소통이 자연스럽게 발화될 수 있는 구조와 동선은 어떻게 만들어질까? 를 논의하고 고민하는 본질은 온데간데 없다. 그래도 변화혁신 과제 완료다. 깔끔하게 새로 꾸며진 사무공간은 그렇게 누군가의 실적이 된다. 가장 손쉬운 방법으로 가장 그럴듯한 변화를 이끌어낸 것처럼 보이는 물리적 환경 개선에 수많은 기업들이 뛰어든 이유다.
본연의 일에 방해되지 않을 정도로는 갖춰야
리버뷰에 음이온과 산소가 나오는 사무실, 특 1급 호텔 출신 주방장이 상주하는 구내식당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 이 역시 금전적 보상과 마찬가지로 불만 요인에 해당하기 때문이다. 그저 하루 8시간 이상, 가장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공간에서 기본적으로 먹고 숨 쉬고 대화하고 살아가는 일에 불편이 없는 정도 만으로 충분하다. 문제는 기본에도 못미치는 회사들이 수두룩하다는 데 있다.
최소 하루 밥값만큼은 서럽지 않게 주자. 적어도 환기만큼은 제대로 되는 사무공간에서 일하게 하자. 명색이 일하는 회사원으로서 커피 한잔에 구질구질 손 떨게 하지 말자. 필요한 물품, 필요한 교육을 제때 충분히 받지 못해 멈추고 정체되는 일만큼은 없게 하자. 대우받고 싶은 만큼 대우해 주자.
구성원 개인 역시 자신의 업무 스타일을 파악하고 언제 어디에서 어떻게 업무에 몰입할 수 있는지 명확한 기준과 의견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회사의 일방적인 결정이 자신만의 루틴이 깨지거나 업무 몰입에 방해로 이어진다면 결국 제 손해다. 때로는 목소리를 내어 이런 변화가 초래할 결과는 무엇인지, 왜 업무 몰입을 방해하는지, 팀 전체의 팀십이 어떻게 와해되는지 근거를 들어 의견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겉만 번지르르 쇼잉 하려는 시도도 문제지만 최소한의 비용으로 최대치를 뽑아먹겠다는 경영진의 음흉한 사심은 더 큰 문제다. 최소한의 기본적 환경도 갖춰주지 않은 채 구성원의 마인드, 스피릿 타령만 하는 불량 기업들의 미래는 뻔하다.
미국이 모 유명 빅테크 기업 사옥 로비에는 소모품 자판기가 있다. 키보드, 마우스 같은 자잘한 소모품부터 노트북, 태블릿, 모니터 등 고가의 전자기기까지 사원증만 찍으면 무료로 가져다 쓸 수 있다. 필요한 물품이 있으면 회사가 즉시 마련해 줄 테니 검색하고 구매하고 배송을 기다리는 시간까지 아껴 본연의 일에만 몰입하라는 회사 차원의 배려다.
"그거야 돈 잘버는 유명 빅테크 기업들이니까 가능한 거 아니오!"
필수 소모품 몇 개, 하루 밥값, 탕비실에 비치된 커피, 간식에도 벌벌 떠는 불량 기업 오너들의 볼멘소리가 여기저기 들려온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이런 답은 어떨까?
이미 그들은 알고 있다. 그 결과로 구성원들이 동기부여되고 본업에 몰입해 가져오는 성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더 거대하다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