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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릭스 leex Jan 16. 2024

회식 때문에 퇴사했습니다

참지, 마요 _ 부조리 _ 강요와 강권

"퇴사하겠습니다."

팀에 합류한지 3개월도 안 된 O의 선언에 일순 조용해졌다. 팀 주간미팅 자리에서였다.

"왜?"

이유를 물었지만 특별할 것도 없는 흔한 답이었다. 리더로서 짐작도 못하고 있다가 느닷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먼저 귀띔이라도 해주지 그랬어?"

마음이 조금 상했지만, 더는 묻지 않았다. 


얼마 후, 유명 로펌 사무직으로 이직했다는 O의 근황을 듣던 중 진짜 퇴사사유(여러 이유가 복합적이었을 테지만)를 알게 되었다.

"회식 자리에서 술 강요해서 그게 힘들었다고 하더라고요."

그 빈자리에 새로 합류한 입사동기의 전언이었으니 틀림없었을 것이다.

나는 잠시 멍해졌다. 서둘러 기억을 되돌렸다. 정말 회식을, 술을 강요했던 적이 있었을까?


회식이라 봐야 뒤늦은 환영회 한 번이 전부였다. 아. 퇴사를 선언하기 전 2박 3일로 진행했던 현장리더 워크숍 뒤풀이까지 포함하면 두 번. 강요라고 여길만한 부분이 있었을까? 싶었다.


전사 조직문화와 교육을 담당하는 팀 특성상, 술자리가 많았다. 5명의 기존 멤버들 역시 술을 즐기는 편에 속했다. 운이 좋았던 건지 멤버별로 짧게는 5년, 길게는 7년을 함께 하는 동안 그 수많은 회식자리에서 단 한 번의 잡음도 없었던 터다. 그래서 음주에 대한 민감도가 떨어졌던 탓일까? 아무리 회식장면을 되돌려봐도 강요라고 볼만한 여지를 발견하지 못하다 문득 떠오른 장면 하나.


남자 대리로부터 '에이, 그래도 첫 잔은 비워야지'라는 말을 두어 차례 듣기는 했다. 그래서였을까? 혹은 부어라 마셔라 워크숍 뒤풀이를 지켜보며 '이건 길이 아니야'라고 느꼈던 걸까? 진여부를 떠나 팀원의 퇴사가 회식과 관련되었다는 사실 자체가 그렇게 창피할 수 없었다.


나는 회식을 좋아하는 사람이었다. 술 자체 보다 마음 맞는 사람들과의 술자리를 좋아했는데, 그런 탓인지 불편한 술자리는 철저히 가렸다. 직속임원과의 회식자리도 참석하지 않는 날이 더 많았다. 술자리 자체를 싫어하는 사람이었다면 때마다 불리고 거절하는 일 자체도 고역이었을 것이다. O의 입장이 이해됐다. 온통 술꾼들에 둘러 싸여 홀로 느꼈을 소외감 혹은 압박감은 예상외로 컸을지 모른다.


퇴사 후 4년, 지금이야 사람 만나는 일 자체가 연중행사일만큼 회식에 참여할 일이 없어 회식문화가 어떻게 달라졌는지 모른다. 코로나 기간 동안 회식 자체가 많이 사라지기도 했고, 개인의 여가를 더 중시하는 요즘 세대 특성상 점심시간에 맛있는 걸 먹거나 일과 후에는 가볍게 밥만 먹고 헤어지는 회식을 선호한다는 이야기는 꾸준히 들려온다.


이제 조직의 임원, 팀장급이 된 친구들 증언도 한결같다. 팀장으로서 '한잔 할래'라는 말이 자연스럽게 나오지 않는다고 했다. 결국 마음에 맞는 몇이 간혹 술자리를 갖지만 예전처럼 흥청망청 2차 3차를 불사하는 먹고 죽자 회식은 거의 사라졌다고들 한다.


그럴 수도 있겠다 고개를 끄덕이고, 부어라 마셔라 두주불사형 회식은 사라져야지 공감하면서도 왠지 모를 아쉬움이 드는 이유는 뭘까? 왕년에 회식을 즐겼던 바이브 때문일까?


사실 회식 그 자체는 죄가 없다. 지치고 짜증 나고 스트레스받는 일상에서 벗어나 마음 맞는 사람들과 술잔을 기울이는 일은 활력소 그 자체였으니까. 요즘 직장인들에게 회식이 즐거움이 아니라 기피대상이 이유는 아마도 '강요' 때문일지도 모른다. 세상이 변한 줄도 모르고 왕년을 찾는 '그 누군가'의 강요 말이다.


요즘 세대 역시 소(삼겹살에 소주) 좋아한다. 없어서 못 먹는다. 분위기만 좋다면 2차, 3차 즐기고 싶은 마음도 같다. 단, 퇴근 이후까지 '강요'하는 그 누군가와는 함께 하고 싶지 않을 뿐이다. 그 누군가가 법인카드만 내놓고 사라져 주기를 바라는 마음은 여기에서 나온다. 메뉴와 빈도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의 문제.


'그 누군가' 역시 '쟤들은 우리랑 같이 술 먹는 거 싫어해'라고 말한다. 그런데도 꾸역꾸역 팀단합을 핑계로 전원 필참 회식을 강행하려는 이유는 대체 뭘까? 그런 거 없이도 회사는 잘 굴러간다. '요즘 애들은 단체 생활을 모른다' 며 구시렁거릴 이유도, 필요도 없다. 회사에서 마주치는 것도 괴로운데 회사밖에서까지 마주 앉아 감정 낭비 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스스로 부하직원들에게 어떤 사람으로 각인되었는가를 먼저 살피는 것이 빠르다.


'그 누군가'라고 할 말이 없는 것도 아니다. 이들도 사실 놀고 싶다. 사람이니까. 왜 자신의 휘하에 있는 사람들과 어울려 이런저런 이야기도 듣고 짐짓 권위도 세우고 싶은 마음이 없을까? 딱딱한 사무실에서 벗어나 술 한잔 하며 맛난 것도 먹고 분위기도 풀고 깊이 있는 이야기도 나누고 2차도, 3차도 가고 싶은데 왜 어린놈들은 슬슬 피하기만 할까?


나 상무 입네, 팀장 입네 팔짱 끼고 제 하고 싶은 말만 주구장창 하니까 같이 술 먹기가 싫은 거다. 속마음 가장 깊은 곳에 실은 군림하고 싶은 욕망이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어느 순간 트리거를 당기듯 '내가 팀장인데' 이런 자세, 말투, 잔소리들이 술술 터져 나온다. 한번 터지면 말리기 힘들다. 좋은 분위기 다 깨지고 일장 훈화의 시간처럼 변하는 일이 어디 한 두 번인가?


그런 분위기는 이미 업무시간 사무실에서 충분히 감지된다. 미팅 자리에서 보면 대번에 알 수 있다. 그 분위기가 고대로 술자리까지 이어진다. 업무시간에, 미팅 시간에 화기애애한 팀은 회식자리도 다르다.


요는 자율이다. 정말 회식을 하고 싶다면 옵션을 주면 된다. 매월 하루 회식의 날을 정해놓고 두~세 가지의 선택권을 주는 것이다. A옵션은 삼소, B옵션은 치맥, C옵션은 파스타에 와인. 자유롭게 원하는 메뉴와 멤버를 구성하도록 하고 법카를 쥐어줘 보라. 이때 참석자들은 강요가 아닌 스스로 선택했다고 여기게 마련이다. 이도저도 다 싫으면 당연히 불참해도 된다.


처음 몇 번은 삼소 옵션에 부장, 차장, 과장만 가득할지도 모른다. 그러다 어느 날은 삼소가 먹고 싶은 Z세대 한두 명이 낄 수도 있는 것이다. 그렇게 자율을 원칙으로 서로 섞이고 섞이다 보면 자연스레 회식은 즐거운, 혹은 필요한 사람들과 회사 밖에서 진지한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소통의 장으로 정착하게 되지 않을까?


'한 사람도 빠짐없이 전원참석' '당일 상무님 번개' 제발 이런 것 좀 하지 말고 스스로 선택하게 하라는 말이다. 싫으면 싫은 대로 안 가면 그만이다. 가고 싶지 않다면 그렇다고 솔직히 얘기해도 괜찮다. 술자리 빠졌다고 찍힐까 고민할 필요도 없다. 생각보다 괜찮다. 나 역시 그랬다. 반드시 필참 하라는 인사담당 상무, 팀장의 모임에 수시로 빠지고도 무사히 살아남았다. '쟤는 원래 저런 놈'이라는 딱지가 붙을 뿐이다.


괜한 조바심으로 이도저도 아닌 선택을 하고선 강요받았다 여기지 말고 뒤에서 구시렁대지 말고 싫으면 싫다고 하자. 상사가 주최하는 회식 몇 번 빠졌다고 마음에 담아뒀다가 불이익을 주는 회사 같으면, 애진작에 붙어 있을 가치도 없다.


술자리를 포함해 어떤 상황에서건, 강요하고 강권하는 일에는 참지 않아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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