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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릭스 leex Jan 23. 2024

S차장은 왜 성희롱범으로 몰렸을까?

참지, 마요 _ 부조리 _ 선한 의도의 나쁜 행동

S가 평소 나쁜 사람이라는 이미지는 없었다. 그는 동일연차 평균 연령에 비하면 대략 5~6살 정도 많았다. 박사 출신으로 입사가 늦었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비교적 승진이 더뎠기 때문이다. 업무에 관해서는 숫자와 데이터에 능하고 깔끔한 편이지만, 큰 틀에서 맥락을 보지 못하고 융통성이 없어 리더감이 못된다는 평이 컸다.


어느 날 S가 난데없는 성희롱 논란에 휘말렸다. 10살 이상 차이나는 같은 팀 여직원 P가 감사파트에 투서를 한 것이다. 회사는 두 당사자를 즉시 분리시키고 진상 조사에 나섰다. 약 한 달여간의 조사 끝에 내린 결론은 '미필적 고의에 의한 직장 내 괴롭힘'

응? 괴롭힘?


성희롱은 인정되지 않았고 가해자 측의 의도가 있었다 보긴 어렵지만 피해자 입장에서 괴롭힘은 인정됐다는 뜻이다. S는 줄곧 억울함을 표했지만, 결국 정직 3개월 징계를 받고 팀도 옮겼다. 성희롱으로 투서를 했는데, 의도가 없는 괴롭힘이 있었다는 결론이라니. 


당시 나는 인사팀 소속, 조직문화 리더를 맡고 있었기에 감사파트에 요청해 관련 내용을 들여다볼 수 있었는데 사건 개요를 정독하고 그런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었던 이유를 이해하게 됐다.


P가 성희롱으로 판단한 S의 발언은 '결혼과 출산'에 대한 이야기였다.


"서른이 되기 전에 결혼하고 출산해야 수월하고 2세에도 좋다"


진술에 의하면, 문제의 발언은 P가 술자리에서 결혼 발표를 하는 과정에서 나왔다. '듣는 사람이 성적으로 수치심을 느꼈다면 성희롱'이라는 정의를 감안하면 위험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먼저 들었지만, 동시에 어느 정도 친분관계에 있고 '결혼'과 관련한 조언의 맥락에서 나온 발언인 만큼, '오지랖 충고' 정도로도 넘어갈 수 있는 수준 아닐까?라는 생각 역시 들었다. 회사에서도 이 부분을 감안했을 것이다.


평소 S와 P는 같은 팀 소속으로 관계가 나빠 보이지 않았다. 한 팀은 아니지만 같은 사무공간에서 일하며 근거리에서 지켜본 바에 따르면 좋아 보이는 축에 속했다. S는 시답잖은 농담을 종종 했고 P는 그것을 웃음으로 받아넘겼다. 오히려 내쪽에서 '무슨 저런 되지도 않는 썰렁한 농담을 해? 근데 그걸 받아주네? 둘이 친한가 보다' 속으로 생각했던 기억. 두 사람 모두 술을 좋아해 회식자리에는 빠짐없이 참석해 어울렸고 사석 자리도 종종 만들면서 가까워졌던 모양이다. 그런 점에서 투서는 놀라웠다.


문제는 S가 그다지 호감형 인물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그다지 매력적이지 않은 외모, 가르치려는 듯한 말투와 심한 사투리, 진중하지 못하고 가벼운 언행 따위 표면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꽤 괜찮은 사람으로 여기는 자의식까지 비호감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그 발언 이전에도 수시로 술자리를 권유하고 출퇴근 시 시답잖은 농담으로 아는 척을 해 괴로웠다는 추가 진술에는 S에 대한 P의 '느닷없는' 적개심이 담겨있었다.  


둘 사이의 더 깊은 내막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다. 다만 조사 자료에 나온 양측의 진술 내역과 평소 인식했던 그들의 표면적 관계를 감안하면, 이 정도로?라는 생각이 들었던 것만은 사실이다. 


분명한 사실은 P가 행동으로 옮기지 않으면 안 될 임계점을 넘을 때까지 S는 그것을 눈치채지 못했다는 점이다. 가해자로 판명이 났지만 가해할 의도는 없었고, 피해자로 인정받았지만 피해의 성격과 종류가 투서의 핵심 사유와는 거리가 있다고 판명된 기묘한 사건. 제삼자 입장에서 봐도 역시 '위계에 의한 전형적' 괴롭힘 또는 '지속적이고도 노골적인' 성희롱이 있었다고 보기엔 무리가 있었다. 


S가 평소 나쁜 사람이라는 이미지는 없었다.

센스가 부족하고 눈치가 없는 사람이라는 인식은 있었지만 위험한 사람이라는 신호는 옅었다. 징계 확정 후 억울해하는 S를 지켜보며 새롭게 알게 된 사실은 자기 객관화가 '매우' 안 되는 사람이라는 정도. 


이 묘한 사건을 제삼자 입장에서 지켜보며 어떤 호기심이 일었다. S가 던지는 여직원들에 대한 시답잖은 농담이나 꼰대 이미지가 하루이틀도 아니고 하필 그 문제가 P라는 특정 대상과 시점에 이르러 별안간 표면 위로 불거진 이유는 뭘까? 라는 궁금증


S의 입장. 싹싹한 성격의 P는 S의 말과 행동에 대해 맞장구를 쳐주며 S의 착각을 키웠을 것이다. 대개 무시당하거나 외면받아왔던 이성직원들과의 상호작용에서 이번만큼은 뭔가 다르다는 느낌을 받았을 것이다. P로 인하여 '나는 생각보다 재미있는 사람이고, 후배를 위하는 선배이고, 술도 잘 사주고 사적인 조언까지 아낌없이 해주는 꽤 괜찮은 상사'로 인식되었을지 모른다는 착각. 술자리의 수만큼 점점 그 도는 심해졌을 것이다. 


P의 입장 또한 복잡했을 것이다. 천성적으로 사람을 환대하는 편인 데다 직장인만큼, 더구나 한 팀에서 일을 하는 직속 상사인만큼 싫어도 싫은 티를 내지 못했을 터다. 처음에는 시답잖은 농이나 오지랖성 관심을 좋게 좋게 넘겼을 것이다. 계속 한 팀에서 봐야 한다면 싫은 티 내지 말자. 한두 번 받아주니 그 빈도와 밀도는 점점 더 짙어졌을 것이다. 아무튼 그랬을 것이다.


S의 마지막 항변은 "싫다고 했다면 절대로 안 했을 것"이었고, P의 마지막 발언은 "아무리 눈치를 줘도 몰랐다"였다.


두 인물의 출발선은 분명 '선의'였을 것이다. 살가운 후배를 위하는 마음, 적응하고 맞춰주려는 마음. 그러다 맞닿은 지점 어딘가에서 이건 아닌데? 싶은 균열이 생기고 소소한 거부와 불쾌의 시그널을 보였지만 그 한쪽이 눈치채지 못한 상태로 문제는 커졌을 것이다. 남녀 간 치정 문제라면 오히려 간단했을지도 모른다. 가해자와 피해자의 원형이 명확하기에. 그러기엔 남자주인공의 매력도가 부족해도 한참 부족하다. 


이 사건은 분명 '솔직한 감정과 표현'의 문제, 그중에서도 '착한 사람 콤플렉스'에서 비롯된 촌극에 더 가깝다. 누구에게나 친절한 사람이 되고 싶다는 선의는 때로 서로 다른 형태의 가해와 피해를 낳기도 한다. 

'다 잘되라고 하는 거야' 자신의 관점만으로 일방적으로 퍼붓는 오지랖 공세

'대놓고 싫은 소리는 못하겠는데 어쩌지' 나쁜 사람 되기 싫어 No라고 못하는 수세

라는 두 클리셰의 콜라보. 


이 문제의 해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싫으면 싫다고 말하는 것,

다름 아닌 'No'의 생활화다. 


상대방이 착각하지 못하게 철벽을 치는 일. 그 썰렁한 농담 재미없으니 관두라는 일침을 날리는 일. 술은 마시고 싶은 사람과 마신다 취향을 명확히 하는 일, 보는 이로 하여금 왜 저래? 고구마형 아침드라마를 연출하지 않는 일 따위.


물론 표정과 에둘러 말하는 표현만으로도 상대의 기분과 심정을 대충 캐치할 수 있는 평범한 사람들이 다수다. 반면 감정 센서가 고장나 상대방의 입장과 의중을 전혀 알아듣지도, 이해하지도 못하는 괴물을 만날 가능성 또한 언제나 열려 있다. 이때 선한 의도의 나쁜 행동은 대체로 파국을 부른다. 


상대에게 어떤 싸함을 느꼈다면, 한 두 번의 실수가 아닌 지속적인 불편함, 불쾌를 자아내는 경향을 캐치했다면, 더 나아가 누구를 향한 것이든 불의를 인지했다면 적절한 시점에 '진실'이라는 백만볼트 전기자극을 날려주어야 하지 않을까? 감정은 되도록 섞지 않고 사실관계에 입각한 인과관계의 시그널을 밝히는 일 말이다.


S는 십수 년간 몸담은 회사에서 불명예스러운 징계를 받고 원래의 팀에서 쫓겨났고 P는 얼마 못 가 퇴사를 했다. 과연 실체 없는 '성희롱 투서 사건'은 누구를, 무엇을 위한 일이었을까?


지 못할 것은 참지 않아야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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