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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릭스 leex Jan 09. 2024

쿨병걸린 T, 물러터진 F

참지, 마요 _부조리 _선입견

밥솥에서 밥을 퍼 두 그릇에 나눠 담는다. 찌개를 데우고 냉장고에서 반찬을 꺼낸다. 접시에 옮길 건 옮기고 반찬통째로 먹을 건 그대로 식탁에 올린다. 숟가락과 젓가락까지 각자의 자리에 놓으면 점심 먹을 준비가 끝난다.

"밥 먹자"

방학을 맞아 아이의 점심을 챙기는 일이 추가됐다. 매일 혼자 점심을 때우다 그래도 어느 정도는 격식을 갖춰 챙겨주려다 보니 이것저것 손이 간다. 물론 요리를 하는 건 아니고 있는 반찬을 데우는 수준이지만 혼자 먹을 땐 반찬 두어 가지에 후루룩 먹으면 됐는데 싶어 귀찮은 마음도 생긴다. 사람 마음 참 간사하다.


둘이 마주 앉아 말없이 밥을 먹다 문득 생각난 질문을 툭 던진다.

"너는 MBTI가 뭐야?"

"INFP요."

즉시 답이 척 나온다. 실제 듣고 보니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던 녀석의 유형과는 조금 다르다. 감각적인 줄 알았는데 직관적이라니? 이성적인 줄 알았는데 감성적이라니? 16년을 옆에서 지켜본 내 아이의 유형마저 제대로 모르고 있었구나 싶어 새삼 놀란다.

"아빠는요?"

"너랑 같아."

평소 대수롭지 않게 여겼던 MBTI였지만 며칠 전 간이 테스트로 INFP 임을 확인했던 참이다. 녀석과 같은 유형이라니 여태껏 몰랐던 사실이다. 사과를 반으로 쪼개 둘로 나뉜 것처럼 DNA의 마법인 것일까? 그러고 보니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게 더 많나 싶어 움찔한다.


한편으로는 내 MBTI를 나를 아는 사람들이 듣는다면 어떻게 생각할까 싶었다. 의외라는 듯 화들짝 놀랄까? 그럴 줄 알았다며 심드렁할까? 뭐 둘 중 하나겠지만 '진짜?' 되묻는 경우가 더 많을지도 모르겠다 싶다. 반대로 내가 알던 사람들은 어떤 유형일까? 짐작해보려 했지만, 그 누구 하나 쉬이 짐작되는 사람이 없다.


김은 I유형 같기도 하고 E같기도 하고, 정은 J같기도 하고 P같기도 하고... 잡힐 듯 잡히지 않는 꿈속의 추격전처럼. 오래 지켜봐 온 사람들 역시 그랬다. 도무지 어떤 유형이다 확정하기가 어렵다. 이럴 수가... 그래도 17년간 회사에서 인사, 교육, 조직문화업무를 하며 이런저런 성격툴도 제법 다뤄본 데다, 수천여명을 면접하고 이런저런 군상들을 지켜보면서 사람 보는 눈도 어느 정도 익혔다고 믿었는데... 더구나 퇴사 후 4년간은 인간본성을 공부하겠다는 일념으로 심리학, 뇌과학, 행동이론 따위 이론은 물론 고전 문학까지 샅샅이 훑지 않았던가?


기업의 인사, 교육, 조직문화 담당자들이라면 최근의 MBTI 열풍이 어리둥절할지도 모른다. 벌써 세상에 나온 지 수십 년도 더 된 구닥다리, 케케묵은 성격유형 검사툴이 갑자기 유행을 타고 Z세대를 중심으로 퍼져나가 사회적 meme이 되어버렸으니 말이다. 인스타 등 SNS는 물론 술자리나 카페에서 심심찮게 들려오는 MBTI 토크들. 16개 유형 영문 조합을 달달 외우고 나는 이런 사람, 너는 저런 사람이라는 해석이 줄줄 나오는 걸 보고 '오~' 감탄의 박수를.


어떤 이유로 MBTI가 대중화가 되었건 그 자체로는 긍정적이다. 나도 나에 대해 잘 모르는 마당에 타인의 유형까지 알아내려는 시도에 이렇게까지 진심인 적이 있었던가? 나 자신은 물론 상대방의 성격유형까지도 제대로 파악할 수만 있다면 세상은 지금보다 더 나아질 수 있지 않을까?


문제는 표면적 현상만 보고 손쉽게 단정하거나 고정관념으로 굳히려는 움직임이다. 그렇잖아도 함부로 타인을 판단하기 좋아하는 선무당들에게 MBTI라는 그럴듯한(?) 근거까지 쥐어주는 꼴. 단순히 자신의 내면을, 타인의 성향을 진지하게 들여다보고 이해해 보려는 시도를 넘어 '나는 원래 이런 사람' '너는 원래 저런 사람'이라며 속단하거나 손쉽게 합리화해 버리기 일쑤다.


더구나 MBTI는 애초에 공신력 있는 성격진단툴도 아니다. 마이어스(Myers)와 브릭스(Briggs)라는 모녀가 그 유명한 정신분석학자 카를 융(Carl jung) 심리유형론을 토대로 고안한 자기 보고식 성격 유형 검사 도구 중 하나에 불과하다. 토대가 되었던 카를 융의 일부 이론 역시 현대에 이르러 유사과학 취급을 받고 있는 마당 아닌가? 기업 내에서도 쓰임새가 많지는 않았다.


애초에 인간이 타고난 기본 성향은 잘 바뀌지 않는다. 다만 겉으로 보이는 형태는 얼마든지 변형이 가능하다. 외부인과의 관계에서 에너지를 얻는 외향형과 외부보다는 내면의 상황에 안정감을 느끼는 내향형은 동기를 얻고 유지하는 메커니즘 자체가 다르다. 겉으로 볼 때 활발하고 사람들과 잘 어울린다고 해서 모두 외향형일 수 없다는 말이다. 나 역시 전형적인 내향형이지만 얼마든지 상황에 따라 장소에 따라 필요에 따라 인싸처럼, 외향형처럼 어울릴 수 있다. 다만 집으로 와서는 대자로 뻗으며 에너지를 충전할 뿐.


무엇보다 제 내면의 진짜 모습을 객관적으로 파악하고 있는 사람들 또한 그리 많지 않다. 자기 보고식 진단에 의존하는 MBTI 역시 얼마나 정확히 스스로를 평가하고 있는지 확신할 수 없다. 하물며 '타인이 보는 나'는 얼마나 정확할까?


최근의 간이 진단 결과에서 깜짝 놀란 부분이 있다. 이전과 달라진 지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P형인 점은 같지만 J유형도 48% 나왔다. 애초에 목표 의식이 명확하고 그 즉시 판단을 내려 이행하는 스타일은 아니다. 대체로 여러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상황을 지켜보며 유연하게 대처하는 편이었다. MBTI 분석에 따르자면 전형적인 P유형. 명확한 의도와 목표를 가지고 칼로 무 자르듯 우선순위 할 일을 결정해 거침없이 내달리는 사람들을 늘 신기하게 바라보는 사람이었으니까. 전에 없던 J유형이 갑툭튀 한 셈이다.


언제부터 이런 변화가 내면에 생긴 것일까? 곰곰이 되새겨봤다.

'아! 퇴사.'


그랬다. 마흔다섯의 퇴사와 그 후 4년이라는 시간은 진도 8 이상의 강진처럼 내 내면의 지형을 뒤틀어 놓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스스로 목표의식을 명확히 하고 그것을 달성하기 위한 단계적 계획을 세우고 이행하는 낯선 생활 습관을 만들어야 했다. 여전히 천성 자체는 흘러가는 대로 두는 P형에 더 가깝지만 그 과정에서 축적된 침전물이 J라는 못 보던 영토로 돋아났을 것이다. 자연스레 P이면서 J인 사람의 내면에 대해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게 됐다.


사람에 대해 공부할수록, 깊이 파고들면 들수록 모르는 것들이 더 많다는 진리를 새삼 깨닫게 됐다. 그 와중에 MBTI 열풍에 눈을 돌렸던 이유는 어떤 불편함 때문이었다. 이성적인가? 감성적인가?를 놓고 오가는 이야기에서 발견한 불씨 같은 것. 

나는 T라서 일말의 연민도 없는 것이 당연하고 

너는 F라서 물러터지고 

SNS와 오프라인 공간 이곳저곳에서 난무하는 자기 합리화와 타인에 대한 섣부른 단정의 흔적들.


에이 농담인데 뭘 그래?라고 웃고 넘기기엔, 선을 넘어도 한참 넘는 혐오와 차별, 갈등의 뿌리가 혹시나 이런 선입견과 고정관념에서 비롯된 것은 아닌지 싶어서다.


이왕 MBTI로 타인을 향한 관심의 물꼬를 튼 김에 이렇게 하기로 한다.

인간은 다양성이 표준이고 어느 한 가지로 묶일 수 없는 복잡한 존재라는 사실을, 상황에 따라 시간이 지남에 따라 표면적인 모습은 변할 수도 있음을, 혼자 있을 때와 함께 있을 때는 완전히 다를 수도 있음을 받아들이기로. 다름은 틀림이 아니고 구별은 이해의 용도이지 차별의 용도가 아님을 이해하기로.


그 정도면 됐다.


점식식사는 10여 분만에 끝났다. 녀석이 자기가 먹었던 그릇을 싱크대에 넣는다. 식탁 의자도 밀어 넣는다. 평소 보이지 않았던 행동들이 오늘따라 눈으로 들어온다.


아들아

넌 누구였고 누구이고 누구가 될 것이냐?

몰랐고 모르고 모를 것


이라는 진리를 인정하고 지켜보기로 한다. 단, 애정과 관심만은 놓지 않은 채로 서로를 이해해 가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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