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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릭스 leex Jan 07. 2024

누구를 위하여 단톡 알람은 시도 때도 없이 울리나

참지, 마요 _내적욕구 _진짜 인맥

새해를 맞아 몇 년간 유지해 오던 몇 안 되는 단톡방에서 모두 빠져나왔다(가족과 고등시절 친구 모임은 제외다). '조용히 나가기' 기능이 있어 다행이지 뭔가. 5명 이내라면 무의미하지만, 10명 이상 모임이라면 당분간 사라진 사실도 모를 테니 '왜 나갔어?' 혹여나 입방아에 오를까 염려도 덜하다.  


어느덧 퇴사 4년 차.

이전의 인맥은 거의 끊겼다. 퇴사초기 세상에서 고립되고자 했던 강력한 의지에도 불구하고 어찌어찌 단톡방이 여섯 개 정도는 남은 터였다. 대학원 동기 모임, 전 직장 76 용띠 모임, 전 직장 인사팀 모임, 대학동기 모임, 초중등 동창 모임, 고등학교 친구 모임까지. 세상을 향한 최후의 끈만은 유지하려는 미련이 남았던 것일까


통화는 고사하고 하루종일 카톡 한 번 오지 않는 날이 더 많았다. 이쯤 되면 광고성 카톡 메시지라도 반가울 만한데, 어느 순간부터 간혹 들려오는 단톡 메시지가 거슬리기 시작했다. 생일 축하, 메리 크리스마스, 새해 인사 따위 특정한 날이면 어김없이 울려대는 메시지 알람에 답하지 않는 날이 차츰 늘었다.


특히 생일 축하 단체 메시지를 참기 어려웠다. 부러 카톡에 '생일표시 하지 않기'를 선택했음에도 불구하고 유독 친절한 사마리안이 몇 있어 기어이 축하 메시지의 물고를 트고야 만다. 아아~제발. 이후 릴레이처럼 쏟아지는 현란한 이모티콘과 축하 메시지들의 물결. 아 고맙고 감사해라.


미안하지만 나는 그 릴레이 메시지를 통해 누군가의 진심을, 진정 어린 감사를 느낀 적이 단 한 번도 없다(물론 몇 안 되는 오랜 인연은 제외다). 전혀 고맙고 감사하지 않은데 그렇다고 해야 하는 그 찰나의 수고가 무척 곤혹스러웠다. 제발, 그냥 넣어두면 안 될까?


손가락 몇 번 움직여 그다지 깊은 관계도 아닌 타인에게 감사와 축하는 물론 좋은 날을 기원할 수 있는 아량을 베풀 수 있는 세상이 되었으니 다행으로 여겨야 할까? 하루에도 수백만개씩 온라인상에 쏟아지고 있을 축하와 감사와 관심을 담은 온갖 메시지에 세상 온정의 총량은 단 0.1g이라도 늘어났을까? 글쎄 모르겠다. 오히려 혐오와 갈등이 더 격해져 간다는 느낌은 그저 기분 탓일까.


고속도로 휴게소에 가면 인사하는 인형이 있다. 단정한 옷차림으로 금발의 가발(왜 굳이 금발일까?)을 쓴 채 배꼽 부근에 두 손을 모으고 45도 인사를 하루종일 반복한다. 그 인사를 받고 진심 어린 환영의 기분을 느끼는 사람이 있기는 할까? 사실은 인사를 하지 않기 위해 만든 자동 인사기계라는 괴이한 존재. 어쩌다 마주칠 때면 반갑거나 고맙기는커녕 을씨년스럽고 공연히 부아가 치미는 이유를 이제는 알 것 같다(이 에피소드는 김연수 작가의 에세이에서 참고했다).


애초에 나는 친절한 사람도 아니고 모두에게 그런 사람으로 비칠 이유도, 필요도 없다는 사실을 문득 깨달은 것은 비교적 최근의 일이다. 그 즉시 스마트폰을 뒤져 카톡, 전화번호 리스트에 올라있는 무의미한 관계들을 모두 정리했고 그렇게 내 카톡 친구목록에는 28명만 남았다. 그중 절반 이상은 가족이나 친척이니 말 다했다. 2024년 새해를 맞아 관성적으로 남겨두었던 단톡방 마저 모두 빠져나왔으니 이제야 찬란한 고립(splendid isolation)이 완성된 셈이다.


누군가는 세상에서 도태된 루저의 자기 합리화라며 가련하게 볼지도 모르겠다. 진정한 인간관계를 맺어 본 적 없는 아싸의 사회적 자해라며 혀를 끌끌 차는 외향형 인싸들의 시선도 감내한다. 그들의 인간관계를 맺고 유지하는 방식 역시 존중하지만 그다지 부럽진 않게 됐다.


그러거나 말거나, 허상의 관계를 유지하는데 허비하던 에너지 전부를 사소한 것까지 끌어모아 내면으로 내면으로 돌린다. 그렇게 새로운 우주의 태동을 준비할 테다. 마침내 중력의 임계점을 지나 빅뱅이 일어나면 나를 중심으로 돌아가는 우주, 그 안에서 반드시 조우하게 될 미지를 기다릴 테다.


나를 참지 못하게 한, 겉치레와는 당분간 안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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