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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릭스 leex Feb 20. 2024

바람이 불면, 2호선 낙성대역으로 간다

참지, 마요 _내적욕구 _위로

낙성대역 4번 출구를 나와 장블랑제리 빵집(동네 빵집이었는데 지금은 알아주는 빵덕후들의 성지가 된)을 오른쪽으로 끼고 5분여를 걷다 사거리길을 대각선 방향으로 건너면 어린 시절 자란 집이 나온다. 인근 셋집에서 태어나 5살 무렵에 집을 사서 이사 왔으니 말하자면 고향인 셈이다.


2층짜리 주택이었는데 지금은 6층짜리 건물이 들어서 옛집의 흔적을 찾긴 힘들다. 초중고를 모두 그 집에서 다녔고 군 전역 후 대학 3학년까지 새로 지은 그 집에서 살았다. 엎어지면 코 닿을 S대를 집 앞에 두고 굳이 강 건너 회기역으로 학교를 다녔으니 지금 생각하면 억울하지 뭔가?


퇴사 4년, 마음이 울적하거나 집에 갇혀 있다는 답답함이 커질 때면 노트북을 챙겨 밖으로 나온다. 딱히 목적지를 정한 것은 아니지만 발길은 저절로 강변역을 향한다. 한강이 펼쳐진 잠실철교를 지나 지하구간으로 들어가 30여분을 더 가면 낙성대역이다.


무엇에 이끌린 듯 전철에서 내려 카드를 찍고 역사를 빠져나와 삼십여 년 전의 등굣길이자 하굣길을 따라 걷는다. 성적 외에는 별다른 근심도 없던 까까머리 중학생은 어느덧 오십에 가까운 중년이 다됐고 그 시절 건물들은 하나 남은 것 없지만 오전의 보드라운 햇볕, 공기를 떠도는 냄새, 뺨을 어루만지는 바람, 구름이 한두 점 낀 파란 하늘, 스쳐 지나가는 사람들은 그때 그대로인 것만 같은 착각.


므두셀라 신드롬(Methuselah syndrome)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므두셀라는 969세까지 살았다는 인물이다. 나이가 들수록 추억을 항상 아름다운 것이라고 생각하거나 나쁜 기억은 지우고 좋은 기억만 남겨두려는 일종의 퇴행을 겪는 현상이라나. 확실히 퇴사 이후의 나는 므두셀라가 되어가고 있음이 틀림없다.


집 뒤쪽으로는 기다란 골목시장이 있었다. 그 길을 따라 세발자전거에 한 살 터울 여동생을 태우고 이삿짐 트럭의 뒤를 쫓아 달렸던 기억. 장 보는 할머니 혹은 엄마를 따라가 떡볶이며 순대며 만두를 얻어먹던 기억. 약국집 딸, 떡집 아들, 채소가게 아들, 생선가게 아들, 방앗간집 딸이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친구들이었던 그 시절. 뭐 그 시기에 나쁜 기억이 있으면 얼마나 있었을까 싶지만. 아무튼.


지금 그 골목시장은 '샤로수길'이 되었다. S대 정문 모양과 가로수길을 섞은 이름이란다. 온갖 점포와 상인들과 장바구니를 든 엄마들로 북적이던 시장은 5년여 전 갑자기 변하기 시작했다. 대형마트가 들어서고 재래시장을 찾는 사람들이 줄어들더니 하나둘 점포들이 사라졌다. 그 자리를 독특한 식당들이 메꾸기 시작했다. 그 바람은 점점 크기를 키워 불과 2~3년 사이에 골목시장은 세련되고 젊은 감각의 인테리어로 무장한 맛집거리로 변했다.


복잡하고 지저분하고 정신없었던 재래시장이 변곡점을 거쳐 전혀 다른 종류의 활기가 넘치는 핫플레이스로 재탄생하는 과정은 그 자체로 흥미롭다. 도시재생과 관련하여 하나의 성공사례로도 쓰일 수 있을지 모른다. 어린 시절 기억을 간직한 공간이 이렇게 변하다니 그 흔적이 몽땅 사라진 섭섭함도 있었지만, 그 과정을 처음부터 지켜보았기 때문일까? 그 어디에도 없는 독특한 개성이 구축되는 과정이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 작년 가을까지 격주 1회씩은 드나들며 소문난 맛집들은 죄다 가보았으니까.


발길을 끊은 건 스벅과 올리브영이 생기고 엽기떡볶이와 국적불명의 요리주점, 고깃집, 사진집들이 메인 스트릿에 우후죽순 들어서면서다. 그외에도 또 다른 프랜차이즈들이 따라 들어올 조짐이 보이면서다. 아, 이 기시감. 사람들이 몰려들면서 임대료가 오르고 적은 자본이지만 독특함 개성, 맛으로 승부를 봤던 가게들이 차츰 사라지고 어디에서나 볼 수 있는 프랜차이즈들의 점령지가 된다. 가로수길이니 경리단길이니 원조 핫플레이스들이 겪었던 이른바 '카니발리제이션' 의 전조.


대기업 간판으로 백선생의 얼굴로 도배된 몰개성의 거리라면, 어린 시절의 흔적이 하나도 남지 않게 된 마음의 고향이라면, 쉰에 가까운 무명의 글쟁이가 노트북을 둘러메고 강을 건너 찾아가 마음의 위안이나 영감을 얻을 꺼리가 딱히 없지 뭔가? 


 인간은 이전의 실패에서 배우지 못하고 같은 어리석음을 반복할까? 공들여 갈고 닦은 독특함이라는 무기를 스스로 저버리며 공멸로 향하는 비극을 자초하는 이유는 대체 뭘까? 머지않아 샤로수길 역시 거대 자본에 굴복한 퇴행의 길에 들어설지도 모른다. 그 이후 이 골목은 또 어떤 모습으로 변할까?


므두셀라가 돼버린 내게 골목시장은 연이은 상실의 아픔이다. 어린 시절의 추억과 흔적이라는 첫 번째 상실. 이곳에 와야만 경험할 있는 독특함이라는 두 번째 상실.


아, 이 참을 수 없는 천박한 자본주의여. 스텔지어의 상실이여. 소중한 마음의 안식처 하나를 날려먹은 책임을 어떻게 질 텐가. 분해서 잠이 안 온다. 이제 바람이 불면 어디로 가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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