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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릭스 leex Mar 05. 2024

마흔여덟 무명 글쟁이지만 봄이 오길 기다립니다

참지, 마요 _내적욕구 _희망

띠링~

문자가 왔다. 반백 무명 글쟁이에게 반가운 소식은 아닐 터

[고객님의 계좌에서 ~원이 출금되었습니다.]

그럼 그렇지


어? 아차 싶다. 잔고가 있었나?

부랴부랴 앱을 열어 확인해 보니 6만 6천 얼마가 남았다. 다행이다. 이번달까지는 어찌어찌 넘겼으니. 이제 다음 달부터는 어떻게 해야 하나? 머리가 아파온다. 관리비, 보험금 등 숨만 쉬어도 빠져나가는 고정비를 제하고 개인적으로 쓰는 돈은 10만 원 안팎. 그마저 교통비 포함이다.


희망퇴직 후 만 4년. 그때만 해도 모아놓은 개인잔고가 꽤 됐다. 퇴직금과 위로금을 한 푼 남김없이 아내에게 넘기고도 1~2년은 너끈히 버틸만했다. 퇴사기념으로 1천만 원짜리 자전거도 신품으로 질렀고(물론 반년도 못 타고 중고장터에 내다 팔았지만) 그 사이 어떻게든 결론이 날 것이라 믿었다.


그 시간이 글쎄, 이렇게 길어질 줄 누가 알았을까? 벌어다 주지는 못할망정 받아쓸 수는 없다는 알량한 자존심으로 꾸역꾸역 버텼다. 무소득 기간이 2년이 넘어서면서 잔고가 바닥날 때쯤 운 좋게 강의 의뢰가 들어오고, 인세(한 달 월급에도 못 미치는 돈이지만)가 들어오고, 또 직계 가족들이 알게 모르게 쥐어주는 돈으로 4년을 근근이 이어왔더랬다. 봄여름가을겨울 사계절이 네번 바뀌는 동안에도 늘 찬 바람 부는 겨울 같았더랬다.




"우리 식구들은 나를 죽은 사람이려니 생각했으면 좋겠어. 밥만 축내고 있으니 내가 없는 편이 더 나을 거야."


누가 내 마음을 들여다보기라도 했을까? 처음 이 말을 들었을 때 마치 내 마음을 들키기라도 한 듯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이 말을 남긴 사람은 다름 아닌 '마키아벨리'

마치 수백년의 시간을 날아와 내 곁에 앉아 소주잔을 주고 받는 술친구라도 된 것처럼...


1512년 중세 이탈리아 피렌체. 스페인의 힘을 업은 메디치 가문이 재집권에 성공하며 시민공화정은 실각한다. 공화정 제2서기장이었던 마키아벨리는 모진 고문 끝에 풀려나 산탄드레아 자택에 유배된다. 한때 유럽 전역을 누비며 각국의 왕, 장군들과 협상을 주도하던 실세에서 하루아침에 시골 농부들과 포카를 치며 시간을 죽이는 신세로 전락한 것이다.


하릴없이 밖을 쏘다니다 참새 두 마리를 잡아와 "오늘 저녁거리는 해결됐지?" 라며 허세를 부렸다는 대목에서는 문득 내 모습이 겹쳐 보여 한동안 생각에 잠긴다. 그 시간은 무려 15년이나 이어진다.


그가 친구에 보낸 편지에는 그 일상이 자세히 묘사되어 있다.

"저녁이 오면 나는 집으로 돌아가 서재로 들어간다네. 서재로 들어가기 전, 흙과 먼지가 묻어있는 일상복을 벗고 관복으로 갈아입지. 그리고 나는 옛 시대를 살았던 어르신들의 정원으로 들어간다네. 그분들은 나를 정중히 맞아주시고 나는 혼자서만 그 맛을 음미할 수 있는 지혜의 음식을 그 어르신들과 나누게 되지. 나는 그 옛 지혜의 음식을 먹으며 다시 태어난다네."

그 시간이 더 없이 행복했음을, 나는 그 곁에서 지켜보지 않고도 쉬이 짐작할 수 있었다.


그 유명한 '군주론'은 그렇게 쓰인 결과물이다. 10여 년간 피렌체 공화국의 외교관으로서 전장을 누비던 경험과 십수 년 유배기간 중 고전을 읽고 사유한 끝에 얻은 통찰의 열매. 조국 피렌체를 어떻게 하면 외세의 침략에 유린당하지 않는 강성한 국가로 만들 수 있을까? 필생의 염원을 담은 역작.


그것은 자신을 고문하고 끝내 내친 메디치가를 향한 연서이기도 했다. 아무 조건 없이 조국의 일을 맡을 테니 '제발' 나를 써달라는 절박한 외침. 안타깝게도 그 바람은 로렌초 디 메디치로부터 외면당하고 만다.


유배생활 15년 차, 그에게도 인생 후반 일생의 기회가 찾아온다. 로마가 스페인의 침공을 받자 마키아벨리는 마침내 부름을 받는다. 말을 타고 한달음에 달려갔지만 운명의 장난이었을까? 이미 로마는 함락당하고 뒤늦게 도착한 마키아벨리는 먼발치에서 불타는 로마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극심한 상심에 빠진 마키아벨리는 고향으로 돌아와 자리에 눕고 그렇게 허무한 죽음을 맞는다.


'군주론', '로마사논고' 등 마키아벨리의 저서들은 그의 사후 비로소 빛을 보게 된다. '사악한 군주를 위한 악마의 서'라는 이유로 로마 교황청은 그의 책들을 금서 목록에 올렸지만 귀족들 사이에 필사본이 돌면서 빠르게 퍼져나갔다. 마침내 금서 목록에서 풀려 정식으로 출간된 이후에는 인류 역사상 가장 임팩트 있는 리더십교본으로 읽히게 되었으니 마키아벨리의 생은 실패한 것일까? 성공할 것일까?


여전히 '군주론'을 둘러싼 논란은 진행 중이다. 히틀러나 무솔리니 등 희대의 독재자들이 침대머리맡에 두고 애독했다는 '독재자의 애독서'로 악명 역시 여전하지만, 실은 강대국들에 둘러싸인 약소국 피렌체가 살아남기 위해 그 지도자가 갖춰야 할 초기 리더의 극단적 특질을 담았을 뿐이라는 의견도 만만찮다. 나무를 베라고 도끼를 만들었는데 그것을 사람을 죽이는 데 썼다면 쓴 사람의 잘못이 라는 두둔.


개인적으로 조국 피렌체와 외세의 침략에 고통받는 약자들의 구원을 위한 통찰의 기록이라는데 동의한다. 자주적인 국가가 되려면 군주는 '사자의 냉혹함, 여우의 교활함'을 갖춰야 한다 주장했지만, 엄연히 초기 단 한번에 한해야 하고 국가가 안정된 이후에는 정반대의 통치를 해야한다고 단언하는 '군주론'의 대목이 그렇다.


마키아벨리는 죽기 직전 꿈을 꾼다.

남루한 행색의 사람들이 누군가에 이끌려 어디론가 가고 있다. 당신들은 누굽니까? 우리는 천국의 사람들입니다.

그들이 떠나고 이번에는 관복을 입은 한 무리의 사람들이 나타난다. 키케로, 소크라테스, 플라톤 등 옛 성인들이 모여 나라의 미래, 인간이란 무엇인가? 따위 심오한 주제를 심각한 표정으로 나누고 있다. 당신들은 누굽니까? 우리는 지옥의 사람들입니다. 그들을 지나치자 하늘에서 음성이 들려온다. "마키아벨리 자네는 어디로 가고 싶은가?" "저는 지옥으로 가고 싶습니다."


스스로의 바람대로 그는 지옥에 있을지도 모른다. 관복을 말끔히 차려 입고 자신의 서재에서 끝없는 토론을 아끼지 않았던 옛스승들과 함께.


평생 세 번에 걸쳐 유린되는 조국의 실상을 생생히 목격하고 어떻게 하면 강국에 유린당하지 않고 독자적 힘을 가진 강국이 될 수 있는가? 고민해 온 '애국자'. 모두가 평등한 민주공화정을 꿈꿔왔지만 오해를 불러일으킬 있는 군주론을 써 세상을 뜨겁게 만든 '이단아'. 15년의 유배기간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나는 누구인가? 내가 이땅에 온 이유는 무엇인가?'를 고심했을 '낙오자'


그럼에도 그 15년은 결코 헛되지 않았다. 아니 그의 생을 완성시켜 주었다. 저녁마다 고전을 읽고 생각을 정리하고 글을 쓰고 로첼라이 정원으로 가 열정넘치는 젊은이들과 공화주의의 미래를 논하던 그 축적의 시간들.


가장 어두울 때가 새벽이 오기 직전이라고 했던가? 바닥이 드러난 잔고를 들여다보며 정말 괜찮을까? 이렇게 살아도 되는 걸까? 헛된 꿈을 좇느라 서서히 도태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르바이트라도 해서 생활비를 보태야 하나? 밤잠 이루지 못하는 나날. 마키아벨리는 그렇게 내 삶에 어떤 계절처럼 훅 들어왔다.


이래도 될까? 정말? 그래도 된다.

내가 품은 희망, 꿈, 그에 닿고자 하는 열망만은 잃지 말자는 다짐. 그 끝이 지옥이라도 괜찮다. 그곳에도 언젠가 봄은 오고 말 테니까.



*이 글에 나오는 마키아벨리관련 이야기는 JTBC 차이나는클래스 '마키아벨리 편'을 참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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