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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릭스 leex Mar 13. 2024

안녕, 드래곤볼

참지, 마요 _내적욕구 _죽을만큼 노력하기

"나를 죽이지 못하는 것은 나를 더 강하게 할 뿐"

- 프리드리히 니체


나는 만화를 좋아했다. 아니 지금도 그렇다.

만화책, 애니메이션 가리지 않는다. 어린 시절 TV에서 방영되던 추억의 만화영화는 지금도 그 주제가를 대부분 기억할 정도다. 미래소년 코난, 은하철도 999, 마징가 Z, 메칸더 V, 그랜다이저, 원탁의 기사, 사파이어 왕자, 개구리 왕눈이, 꼬마자동차 붕붕, 모래요정 바람돌이, 이상한 나라의 폴, 신밧드의 모험, 어린이 명작동화, 빨간 머리 앤, 플란다스의 개, 요술공주 밍키, 피구왕 통키, 아기공룡둘리, 달려라 하니, 날아라 슈퍼보드, 옛날 옛적에, 2020 원더키디, 검정 고무신 등 종류도 다양한 추억의 조각들.


만화책 역시 환장했는데, 용돈을 모으거나 설날 세뱃돈을 받으면 한 권 두 권씩 사모으곤 했다. 보물섬이나 어깨동무 같은 월간잡지는 말할 것도 없고 꺼벙이, 맹꽁이 서당, 로봇 찌빠, 천하장사 오찰방, 탐험대장 떡철이, 쿤타맨 같은 명랑만화 종류와 권법소년, 용소야 같은 액션만화 따위를 사모은 기억이 난다.


그 시절 어른들은 만화를 거의 불량식품 취급 했는데, 한 번은 어렵게 사모은 만화책을 아버지가 몽땅 불태워버려 일주일 넘도록 상심에 빠지기도 했다.


언제였던가. 그동안 보아왔던 TV 만화영화와 만화책의 상당수가 일본만화였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을 때의 충격과 배신감이란. 하긴 주인공의 이름이 죄다 쇠돌이니 철이니 했으니 깜빡 속을 수밖에. 만화를 저질로 취급하며 악마화하던 사회적 분위기 탓이었을까? 국산 만화는 점차 위축되고 일본의 유명 작품들이 500원짜리 해적판으로 둔갑해 이상한 제목을 달고 유행하기 시작했다.


'시티헌터' '공작왕' '북두신권' '타이의 대모험' 같은 일본만화들은 충격적이었다. 낯선 그림체와 생소한 스토리로 초중고 교실을 뒤덮다시피 했다. 그중에서도 가장 인기 있던 만화가 바로 그 유명한 '드래곤볼'이었다. 당시 500원짜리 해적판의 제목이 '날아라 오서방'이었다지?


1988년 아이큐점프라는 주간 만화잡지가 창간된다. 침체된 국산 만화를 살린다는 취지로 야심차게 기획된, 만화만을 위한 잡지가 탄생한 것이다. 가격은 단돈 1000원. 당시 초등학교 5학년이었던 나는 먹고 싶은 불량 식품도 안 사 먹고 일주일 용돈을 고스란히 모았다가 발매일만 되면 문방구로 달려가곤 했다. 창간호부터 사모은 아이큐점프를 지금도 소장하고 있었더라면...


허영만 '망치', 이현세 '아마겟돈', 고행석 '우리들의 우상' 등 거장들의 대작도 많았지만 창간 1년 후에야 아이큐점프는 전성기를 맞는다. 해적판으로 무분별하게 유통되던 문제작 '드래곤볼'을 정식으로 수입해 연재를 시작했기 때문이다. 심지어 초기에는 아예 별책부록으로 제공하면서 아이큐점프의 인기는 절정으로 치솟았다. '드래곤볼' 신화가 본격화된 건 아마도 그때부터였을 것이다.


서유기를 모티브로 손오공이라는 꼬마가 주인공인 명랑만화로 시작했지만, 성인이 된 이후 이야기를 영웅 플롯의 액션만화로 풀면서 전설은 시작된다. 두 손을 모아 기를 발사해 적을 쓰러뜨리는 '에네르기파'라는 개념의 등장, 녹색피부의 피콜로 대마왕, 꼬리 달린 손오공이 실은 외계인이자 전투종족인 사이어인 카카로트라는 설정, 또 다른 사이어인들의 지구 침공, 상대의 전투력을 측정할 수 있는 스카우터라는 기계, 베지터라는 엘리트 사이어인의 등장, 나메크 성, 끝판왕 격인 프리더의 등장과 대결, 초사이언으로의 변신 등 생전 처음 보는 개념과 설정들이 대거 등장하는 데다 생동감 넘치는 액션신은 정말이지 손에 땀을 쥐게 했다. 


전세계 독자들은 빠른 속도로 <드래곤볼>에 빠져들었다. 2012년 기준으로 2억 3천만부를 팔아치운 <드래곤볼>이 전세계 만화업계에 끼친 영향은 실로 막대했다. 변신을 위해 뜸을 들이고 긴장감을 조성하는 방식이나 격투장면에서 기를 모아 발사하는 공격장면의 묘사, 캐릭터들이 기를 운용해 하늘을 자유롭게 나는 장면등은 하나의 클리셰가 되었다. 다른 작품에서 뭘 어떻게 묘사해도 결국은 <드래곤볼>이 떠오르는 지경이 되었으니 말 다했다.


이쯤 되면 작가가 누굴까? 궁금해진다. 그 이름은 바로 도리야마 아키라. 개인적으로 일본 문화에는 별 관심도 없고 부정적인 편이다. 특히 극우 성향을 숨기지 않거나 일본 군국주의를 미화하는 망언을 서슴치 않는 종자들의 경우 아무리 유명하다 해도 패싱 한다. 베가본드의 다케히코 이노우에, 진격의 거인 이시야마 하지메, 에반게리온의 작화 감독 등이 그런 부류다.


그런 논란이 없고 작품성이 뛰어난 경우에 한해 관심 있게 지켜보는 작가가 몇 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도리야마 아키라였다. 그는 며칠 전 세상을 떴다. 1955년 생, 향년 68세. 사인은 급성 경막하 출혈. 작년 <프렌즈> 매튜패리, <나의 아저씨> 이선균의 죽음만큼이나 내게는 충격적으로 다가왔다. 그만큼 드래곤볼은 단순한 만화가 아니라 어린 시절의 한 부분을 차지하는 퍼즐이었기 때문이다.


성인이 되어 다시 읽었을 때는 단순한 재미 말고도 깊이 생각하게 하는 대목도 많았다. 마치 어린 시절 읽었던 <어린 왕자>와 성인이 되어 읽은 <어린 왕자>가 전혀 다른 작품으로 느껴지듯.


특히 죽음 직전까지 갔다 부활하면 전투력이 대폭 상승한다는 사이어인만의 독특한 설정은 '나를 죽게 하지 못하는 것은 나를 강하게 할 뿐'이라는 니체의 말을 떠올리게 한다. 이 과정을 통해 손오공은 마침내 전설의 '초사이어인'으로 진화해 우주 최강의 악 '프리저'를 쓰러트리고 우주를 구한다.


이외에도 스토리 곳곳에 등장하는 반복되는 삶과 죽음이라는 윤회 사상, 세계 아니 우주 전체의 평화를 위해 아무런 조건 없이 무한 헌신하는 영웅들의 이야기, 악은 절대로 선을 이길 수 없다는 권선징악의 명징한 메시지 까지 분명 단순 오락용으로 보기엔 지나치게 가볍다.


토리야마 아키라는 니체를 비롯한 철학에 심취한 사람임에 틀림없다.


그는 업계에서 프런티어(개척자)로손꼽혔다. 메가 히트작 <드래곤볼>의 성공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 이전의 또 다른 유명 작품인 <닥터 슬럼프>의 등장부터 그랬다. 마초적 극화체와 무거운 스토리가 주류이던 당시 일본 만화계에 동글동글하고 귀여운 캐릭터가 주축이 되는 코믹 장르의 등장은 신선한 충격을 주기에 충분했다.


닥터 슬럼프. 전설의 시작


낼모레 오십을 앞둔 지금도 여전히 나는 만화와 애니메이션을 즐긴다. 특히 픽사와 디즈니의 애니메이션을 사랑한다. 토이스토리 시리즈, 몬스터 시리즈, 인크레더블 시리즈는 적어도 4~5번은 반복해서 봤고, <코코>는 인생 역대 베스트 탑3에 꼽을 정도로 좋아한다.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을 만든 지브리 작품도 즐겨 본다. <미생> <만화십팔사략> <만화 삼국지>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 <이두호의 임꺽정>은 전질을 소장 중이고 알만한 만화책은 거의 모두 봤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원래도 만화와 만화영화를 사랑하던 한 어린아이의 삶에 무한한 상상의 동력을 심어준 데 도리야마 아키라를 비롯한 위대한 만화가들의 존재가 있었음을 의심치 않는다. 내 세계관을 구축하고 무언가 나만이 할 수 있는 이야기를 만들고 싶다는 욕구, 그러니까 글을 쓰는 작가가 되고 싶다는 꿈은 그 즈음부터 싹텄음에 틀림없다.


무한긍정의 힘으로 유쾌함을 잃지 않는 심성, 현재에 만족하지 않고 매 순간 더 강해지려는 의지, 죽기 직전의 극한 노력과 고통이 수반되어야 한계를 뛰어넘어 내가 원하는 무언가에 닿을 수 있다는 엄중한 진리(매우 극단적이면서 상징적 의미이긴 하지만)를 새삼 배운다.


도리야마 작가의 명복을 빕니다.

R.I.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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