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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릭스 leex Feb 13. 2024

머리를 올린다는 말

참지, 마요 _부조리 _몹쓸 관습

들으면 참을 수 없는 말들이 몇 개 있는데 그중

'머리 올린다'라는 말이 그렇다.

골프를 하는 사람들에게 '머리 올리다'는 첫 필드 라운딩을 의미하는 은어다.


한때 골프에 빠져 손바닥이 벗겨질 정도로 드라이버와 7번 아이언을 휘두르던 때가 있었다. 스크린 골프를 처음 접한 후 본격적으로 연습을 해야겠다는 생각에 클럽을 중고로 사들이고, 연습장을 예약해 시간만 나면 공을 쳐댔다. 그즈음 과장에서 차장으로 승진을 했고, 전혀 관심도 없고 눈에 보이지도 않았던 사내 정치의 실체가 슬슬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 차장 골프 치나? 요즘 손바닥이 벗겨질 정도로 연습한다는 소문이 들리던데?"

"아, 예 그냥 재미를 좀 붙여서 무리를 하고 있습니다."

"언제 머리 올려야지?"

"머리요?"

"첫 필드 라운딩 말하는 거야."

말을 꺼낸 상무를 대신해 옆에 앉아 있던 팀장이 넌지시 일러줬다. 비즈니스 포트폴리오상 수도권에 여러 개의 CC(Country Club, 골프클럽)를 위탁운영 중이던 회사는 임원, 팀장들이 골프 라운딩을 즐기기에 최적의 환경이었는데, 사내 정치와 끼리끼리 문화를 심화하는 온상 역할을 했다.


직장 내에서 골프 관행은 지극히 전형적인데, 대개 임원급 상사가 자신과 마음 맞는 후배들을 모아 4명 그룹(속칭 포썸)을 만들어 라운딩을 간다. 그중 첫 경험을 하는 사람이 껴있다면 '머리를 올려준다'라는 표현을 쓰며 생색을 내는 식이다. 은연중 힘과 권위의 과시가 숨어 있다. 그저 취미 모임이라고 보기엔 그 안에서 벌어지는 관계의 밀도와 깊이가 예사롭지 않다. 밀실 정치를 밖으로 옮긴 것에 다름 아니다.


당시 나는 그저 공치는 재미에 빠졌을 뿐, 무리를 이뤄 필드에 나가 돈을 걸고 내기 골프를 치며 친분을 쌓는 일 따위에는 아무런 흥미도 없었다. 더구나 사내 정치에도 아예 관심이 없었다. 무엇보다 휴일까지 회사 사람들과 엮여 사실상 임원들의 비위를 맞추고 뒤치다꺼리를 하는 일에 내 시간을 뺏기고 싶지 않았다. 대단한 뜻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저 마음이 동하지 않았고 무엇보다 귀찮았기 때문이었다.


얼마 후 '머리를 올리다'라는 은어의 출처를 알게 되면서 사내 골프 모임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더 커졌다. 조선시대, 여자가 결혼할 때 머리를 올리고 비녀를 꽂듯, 성매매를 하는 기생이 첫 손님을 받을 때 머리를 올리고 비녀를 꽂는다는 성적 의미, 즉 '처녀성을 잃는 첫 경험'의 뜻을 담고 있음을 알고 머리를 한 대 맞은 듯했다. 


직속 임원은 종종 '머리를 올려주고' 4명 모임에 끼워주겠다며 대단한 시혜를 베풀듯 손을 내밀었지만 오버액션이 가미된 호들갑으로 손사래를 쳤다. 

"전 실력도 안되고, 민폐만 될 뿐입니다."

그렇게 사내정치에서 스스로 고립을 택했지만 마음만은 편했다.


권위 가득한 남성 상사가 여성 부하직원에게  "골프 친다고? 곧 머리 올려 줘야겠네?"라고 은밀히 말하는 장면을 상상해 보라. 오소소 소름이 돋는다. 권위, 밀실, 성적 우월감 따위가 한데 뭉쳐진 블랙코미디의 대사 같지 뭔가?


나는 여성도 아니고 페미니스트와는 더더욱 거리가 멀다. 정의를 입에 담을 만한 그릇도 아니다. 매사 모범적인 삶과도 거리가 멀다. 그저 상식적인 선에서 인간 대 인간으로 인격적 관계를 주고받는 '무던한' 세상에서 살기를 원하는 소시민일 뿐이다. 그런데 왜 유독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불쾌감이 그리 치밀어 올랐을까?


누군가는 그저 관행적으로 써온 말인데 뭐 그리 민감한가? 라며 따질 수도 있겠다. 그 의견 역시 존중한다. 남성우월, 끼리끼리, 사내 정치질 그런 의도는 1도 없이 그저 골프가 좋아 마음 맞는 사람끼리 팀을 이뤄 순수하게 플레이 자체를 즐기는 사람이 왜 없을까? 화려한 클럽에 음악과 춤을 즐기러 갈 뿐 이성과의 즉석만남은 '조금도' 관심 없다고 극구 부인하는 청춘도 간혹 있으니 말이다.


이 표현에 대한 논란은 이전부터 있어 왔던 것으로 보인다. 관련 칼럼도 몇 차례 나왔다. 논조는 대개 '성적 비하 등' 문제가 있어 보이지만 '관행처럼 써온 표현이니 민감해하지 말자' 정도로 읽힌다. 그에 딸린 댓글을 보면 '남자들도 결혼을 할 때 머리를 올린다는 표현을 썼다'며 성적비하가 아니라며 두둔하는 사람도 눈에 띈다. 그러나 남성에게는 '상투를 튼다'라고 하지 '머리를 올린다'라고 하지 않는다. 엄연히 기생문화에서 나온 여성 비하적 표현임에는 틀림이 없다. 거기에 사내정치라는 불투명하고 은밀한 힘의 역학까지 끼어 체질적인 거부반응을 일으켰던 것인지도 모른다.


비단 우리만의 문제도 아니다. 골프의 본거지나 다름없는 미국에도 첫 필드 경험을 표현하는 비슷한 말이 있다. Pop the cherry(처녀성을 잃다 라는 속어)라는 은어를 쓰는 것으로 알려졌는데, 골프가 남성들이 주로 즐기던 스포츠(골프뿐 아니라 거의 모든 스포츠가 그렇지만)였고 과거의 용어가 관행적으로 전해진 점을 감안하더라도 이제는 그런 시대가 아니지 않은가?


골프계 역시 여성 골퍼들이 참가하는 LPGA의 역사도 오래고 남녀평등이 상식이 된 마당에 굳이 시대착오적이면서 남녀 갈등을 야기할 가능성을 품고 있는 은어를 고집할 필요는 대체 뭘까?


미망인 역시 비슷한 경우다. 未亡人 아직 죽지 못한 사람이란 뜻인데 아니, 남편이 죽으면 아내는 따라 죽기라도 해야 한다는 말인가? 하나하나 따지고 보면 관행적으로, 습관적으로 쓰는 표현 중에 은연중 특정 계층을 비하하거나 얕잡아 보는 말들이 꽤나 많다. 


이런 관행이나 관습적 언어, 표현, 가치관들을 바로 잡는 일은 남녀의 문제도, 신구의 문제도 아닌 상식의 문제가 아닐까? 크건 작건 불합리를 향한 다수의 순응이 모여 거대한 부조리를 만든다는 사실을 새삼 실감한다. 


이런저런 이유로 골프에 대한 흥미를 잃고 손을 놓은 지 오래인 지금

언젠가 다시 손바닥이 다 벗겨질 정도로 골프 클럽을 잡을 수 있기를 

무엇보다 언제 어디서든 관습과 익숙함을 가장한 차별과 혐오의 발언이 들려오면 그때, 


분연히 참지 않기를 희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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