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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양을 품은 별 Oct 03. 2024

단테의 별 - 1권 2부 10화

빛의 출현(出玄)-빛을 품다/존경도 사랑? - (2)

오매불망 기다리고 기다리던 토요일, 문승협은 하교하자마자 경주마처럼 집으로 갔다. 뜻밖의 할머니심부름이 기다리고 있어 당황했다. 3시 전까지 마치려고 가슴 졸이며 동분서주하였다. 시장에 가서 일회용 용기를 사 오고, 그 용기에 담은 음식을 우체국 건너편에 사는 할머니친구에게 전달했다. 다행히 2시 반쯤 끝났다. 그때부터 전화기를 맴돌며 할머니의 외출을 빌었지만, 그런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최선경이 전화한다는 3시가 다가왔다. 문승협은 전화기 옆에서 졸고 있는 할머니가 신경 쓰였다.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무슨 이야기를 할지 생각하였다. 그러나 시곗바늘이 3시를 가리키는데도 전화는 오지 않았다. 흐르는 시간만큼 속도 타 들어갔다.

15분이 지날 즈음, 할머니 박옥춘이 갑자기 일어나 방문을 나섰고 동시에 전화벨이 울렸다. 문승협이 무릎 꿇은 채 잽싸게 수화기를 들었다. 평소 같으면 할머니가 전화 왔냐고 물었을 텐데 별말이 없었다.

박옥춘이 졸다 일어나 나간 데다, 전화벨이 울린 순간 문승협이 수화기를 들어서 듣지 못했다.

문승협은 혹여 밖에서 할머니가 들을까 봐 수화기를 손으로 가렸다. 떨리는 마음으로 입을 열었다.

“여보세요.”

“나야, 선경이.”

“…….”

문승협은 수화기에서 들려오는 선경이라는 말에 목이 메었다. 실어증 걸린 마냥 말문이 막혀버렸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승협아.”

“응, 나야, 말해.”

“전화 늦게 해서 화난 거야?”

“아냐 그런 거.”

두 사람은 하고픈 말은 많은데 가슴이 먹먹해서 말이 쉽게 나오지 않았다. 말하지 않아도 서로의 마음을 충분히 느꼈지만, 떨리는 마음에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서두를 찾지 못했다.

“잘 있었어?”

“응, 너는?”

“나야 당연히 잘 있지.”

“잘 있었다니 다행이다.”

“편지 받았어?”

“응, 받았으니까 이렇게 전화 옆에서 기다렸지.”

“편지 내용대로 잘하고 있어야 해, 알았지?”

“응, 그럴게. 근데, 서울 갈 때 몇 시에 출발한 거야?”

“아침 9시 기차를 타야 해서 8시쯤 나왔어.”

“그 그랬구나.”

“왜? 집에 왔었어? 왔었구나.”

“아 아니, 아니야.”

문승협은 최선경에게 걱정 끼치고 싶지 않아 집에 간 사실을 숨겼다. 최선경은 문승협목소리만 듣고도 왔었다는 걸 알았다. 최선경도 집을 나서면서 혹시 문승협이 와있을까 봐 주변을 두리번거렸었다.

둘은 집에 갔고 기다렸던 사실을 숨겼으나, 서로 어떤 마음인지 알기에 더 이상 확인하지 않았다.

“나 아직 이해 안 가는 게 있어.”

“뭔데?”

“헤어질 준비, 헤어질 시간을 줬어야 하지 않아?”

“뭐야, 우리 헤어진 거야? 잠깐 떨어져 있는 건데, 헤어지는 것처럼 그래야 해? 너 나랑 헤어진 거야?”

“아 아니, 그런 말이 아니잖아.”

“됐고. 너 나랑 헤어지려면, 나한테 헤어질 준비하고 헤어질 시간 꼭 줘라, 알았지?”

“아 알았어.”

문승협은 원하는 대답을 듣지 못했지만 역설적인 최선경말을 위안 삼았다.

둘은 일상적인 대화로 이어가며 평정을 찾았다. 그러나 전화를 끊어야 하는 시간이 다가오면서 다시 조급해졌다. 다음을 희망으로 삼으며 통화를 끝내야 하는 슬픔을 극복하려고 애썼다.

최선경이 다음 주 이 시간에 전화하겠다고 약속했다. 다음 통화 때는 한 주 동안 잘 보낸 일상을 낱낱이 보고하라고 하였다. 문승협은 충실히 명령에 따르겠다는 대답으로 어떻게든 최선경과 연결을 유지하려 했다.

“저기 선경아, 전화번호 좀 알려주면 안 돼?”

“나중에, 나중에 알려줄게.”

“그 그래, 알았어.”

문승협은 졸라서라도 알고 싶었으나, 이기적이어서는 안 된다고 스스로 달래며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짧은 통화가 아쉬우면서도 안도감이 밀려왔다. 끓어질 뻔한 최선경과 관계가 계속 이어져 만족하였다.


문승협은 토요일 오후 3시에 맞춰 한 주를 보냈다. 일상을 활기와 보람으로 채우려고 노력했다.

그렇게 토요일이 왔다. 3시가 다가오는데, 오늘따라 잘못 걸려온 전화까지 유난히 전화가 많았다. 할머니가 통화를 길게 하는 바람에 조바심으로 피가 말랐다. 다행히도 할머니가 통화를 끝내자마자 외출했다. 3시 30분이 넘어서 전화벨이 울렸다.

“여보세요?”

“응 나야.”

“잘 있었어?”

“응. 전화가 계속 통화 중이어서, 고장 났나 했어.”

“아, 할머니가 계속 통화했어. 혹시 전화 안 오면 어쩌나 엄청 걱정했는데.”

“호호, 다음에도 그러면 4시까지는 계속할게, 전화 때문에 너무 목메고 있지 마.”

“입장 바꿔봐, 그럴 수 있나. 일주일에 한 번인데, 내겐 더없이 소중한 시간이라고.”

“호호, 나도 그래, 나도 이 시간만 생각하고 일주일을 버텼어.”

“며칠 전에 남산 3호 터널이 개통됐다는데, 우리 사이 길도 뻥 뚫렸으면 좋겠다.”

“그럴 거야, 그래야지.”

문승협은 최선경지시대로 지난 일 주간 있었던 일을 일기장 읽듯 조목조목 이야기하였다.

최선경은 문승협의 일상이야기에 이래라저래라 맞춤식 충고에 열심히였다. 마치 열성적인 엄마가 자식에게 하나하나 가르치듯 했다. 그렇게 계속 들으며 맞장구만 칠뿐 자신의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문승협이 전학한 학교를 묻고 새로운 친구를 물어도, 최선경은 나중에 말해주겠다는 말만 반복하였다.

최선경이 떨어져 있는 동안 펜팔을 하자고 했다. 편지 보낼 테니 답장은 물론이고, 자기가 쓴 편지보다 두 배를 써서 보내라며 협박하였다. 다음 주 이 시간에 또 보자는 인사로 전화를 끓었다.


문승협은 편지 받을 기대로 또 일주일을 보냈다. 할머니 박옥춘과 작은 고모 문희경이 친척 결혼식에 갔고, 동생 문현아도 친구랑 놀러 나가 혼자 집에 있었다. 환경과 시간에 구애받지 않고 최선경과 편안히 통화할 수 있다는 즐거운 마음으로 TV를 켰다.

‘YH무역 노동자들이 사측의 위장 휴업 조치에 반발하여, 제3차 정기대의원대회를 열어 농성에 돌입……. 학생운동 출신들이 모인 최초의 공개 단체인 민주청년인권협의회, 민청협이 출범……. 지난달 4월 14일 서울 세종로 구시민회관터에 개관한 세종문화회관에 시민들의 발길이 끓이질…….’

문승협은 최선경에게 무슨 이야기를 할지 머릿속으로 정리하려고 TV를 껐다. 오늘은 최선경에게 어떤 말을 들을지 예상도 해보며, 이전의 조급함 없이 여유롭게 전화를 기다렸다. 그러나 행복한 상상과 다르게, 3시가 넘고 3시 30분이 되어도 전화가 없었다. 혹시 수화기를 잘못 놨는지, 전화가 이상한 건 아닌지 몇 번을 확인하였다. 4시가 다 되어가는데도 전화벨이 묵묵부답이어서 점점 안절부절못했다. 최선경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것은 아닌지 이런저런 생각과 불안감에 머리가 터질 것 같았다. 잠자리에 들어서도 마찬가지였다.


문승협의 생활이 다시 의기소침해졌다. 그렇다고 희망의 끈을 놓지는 않았다. 하지만 최선경의 전화는 일주일 뒤에도 오지 않았다. 펜팔 하자며 보내겠다는 편지도 오지 않았다. 문승협은 최선경에게 떼써서라도 전화번호를 알아놨어야 했다며 자신을 질책하였다. 소식이 끓긴 답답함과 불안한 마음을 가눌 길이 없었다.

또 일주일이 지난 토요일에도 최선경에게서 전화는 오지 않았다. 문득 김철종말이 떠올랐다. 최선경의 약속을 전해주던 날, 무슨 일 있으면 집으로 오라고 했었다. 무작정 김철종을 찾아갔다.

김철종이 기다렸다는 듯이 반겼다. 부모님께 인사하려는 문승협을 떠밀어 얼른 자기 방으로 데려갔다.

문승협이 냉정을 찾아 그동안 최선경과 있었던 이야기를 하려 했으나 두서가 없었다. 자기가 한 말이 무슨 뜻인지 본인도 헷갈렸다. 답답한 마음에 울컥하여 눈물이 핑 돌았다.

짠한 표정으로 지켜보던 김철종이 안 되겠다 싶어 잠깐만 가만히 있어보라고 하였다. 잠시 생각하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제갈민주에게 들은 이야기이고 자기 짐작이라 확실하지 않다며 전제를 깔았다. 최선경이 서울로 전학 간 이유는 병치료 목적이며, 지금은 더욱 악화돼서 휴학한 것 같다고 했다.

문승협은 무슨 청천벽력 같은 말이냐며, 믿을 수 없으니 제갈민주라도 불러 확인해 달라고 하였다.

김철종이 문승협을 제갈민주집으로 데려갔다. 제갈민주가 김철종추측이 맞을 거라며, 지금은 자신도 최선경과 연락이 안 된다고 했다. 문승협에게만은 철저히 비밀로 해달라는 최선경당부 때문에 말 못 했다며 미안하다고 하였다. 다음 주 현충일 동창회모임 때까지 자세히 알아보겠다고 덧붙였다. 문승협은 제갈민주에게 간절한 마음으로 각별히 부탁했다. 집까지 바래다주겠다는 김철종을 뿌리치고 충격받은 표정으로 걸음을 옮겼다.

“승협아, 잠시만.”

“…….”

“이거, 우리 집에 있드라.”

“뭔데?”

“일전에 선경이가 우리 집에서 놀다 갔었는디, 이것을 흘리고 갔어.”

문승협이 쪽지를 받아 들고 떨리는 손으로 펼쳤다.

‘너와 나는 자유로워질 거야, 나무 위의 새들처럼. 나는 너를 사랑하지만, 너는 나를 사랑하니? 나를 꼭 안아주면 스릴을 느껴. 다이아나, 보이지 않아? 마음으로 너를 사랑해 그리고 우리가 헤어지지 않았으면 좋겠어, 제발 내 곁에 있어줘 다이아나. 오직 너만이 내 마음을 가져갈 수 있어, 네가 나를 홀리면 너의 사랑스러운 품에 안겨서 네가 주는 걸 느낄 수 있어. 나를 꽉 안아줘, 나를 꽉 잡아, 제발 내 곁에 있어줘 다이아나. 다이아나=문승협.’

쪽지에는 최선경이 ‘폴앵카의 Diana’ 노래가사를 해석하여 시로 쓴 글이 적혀있었다. 최선경생일 때 최선경방에서 폴앵카의 Diana노래를 들으며 최선경이 했던 말이었다.

문승협은 마지막에 적힌 ‘다이아나=문승협’을 보았다. 다이아나를 문승협으로 바꿔 다시 읽었다.

‘너와 나는 자유로워질 거야, 나무 위의 새들처럼. 나는 너를 사랑하지만, 너는 나를 사랑하니? 나를 꼭 안아주면 스릴을 느껴. 문승협, 보이지 않아? 마음으로 너를 사랑해 그리고 우리가 헤어지지 않았으면 좋겠어, 제발 내 곁에 있어줘 문승협. 오직 너만이 내 마음을 가져갈 수 있어, 네가 나를 홀리면 너의 사랑스러운 품에 안겨서 네가 주는 걸 느낄 수 있어. 나를 꽉 안아줘, 나를 꽉 잡아, 제발 내 곁에 있어줘 문승협.’

글을 읽으면서 그렁그렁 맺혔던 눈물이 양쪽 볼을 타고 주르륵 흘러내렸다. 왜 최선경이 Diana노래를 좋아하였는지 이제야 그 이유를 알았다.

문승협이 김철종과 제갈민주에게 간다는 말도 하지 않고 돌아섰다. 처량하게 터벅터벅 걸으면서 생각했다. ‘왜 진실은 꼭 나중에 알게 되는 것일까?’

그렇게 무의식 중에 걷다 도착한 곳은 최선경집 앞이었다. 지나가는 사람도 의식하지 않고 불 꺼진 창을 멍하니 바라봤다. 최선경의 시를 다시 보며 울다 멈추길 반복하였다. 어느 정도 마음이 가라앉자 집으로 향했다.

그때 누군가 문승협뒷모습을 지켜보고 있었다. 조금 전 문승협 앞을 지나갔던 최선경집 근처에 사는 서예학원친구 홍지아였다.


고교평준화계획으로 과외를 전면금지한다는 뉴스가 있었지만 아직 시행 전이었다.

문승협은 중학교입학 이후 국민학교 때 과외친구들과 자연스레 뿔뿔이 흩어졌다. 학교와 끝나는 수업시간이 각기 달라 과외시간을 맞추기 어려워서였다. 그 대신 중학교친구들과 그룹을 짜서 학교선생에게 성문기초영문법과 수학기본정석을 과외받았다.

문승협이 과외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라이카사진관을 들렀다. 이정주나 이정주의 부모님과 부딪힐까 봐 조심스러웠지만 최선경을 보려고 용기 냈다. 몇 달 전에도 몇 주 전에도 어제도, 최선경은 늘 같은 얼굴에 같은 웃음이었으나, 문승협눈에는 볼 때마다 달리 보였다. 슬프면 슬픈 대로 기쁘면 기쁜 대로 반겨주었다. 언제나 유일하게 위안을 주는 최선경사진이었다.

“선경아, 내일 뜨는 해는 어제의 해 일까, 새로운 해 일까? 아니면, 나만의 해일까?”

문승협은 고하도로 하이킹 갔을 때 최선경에게 하였던 질문을 되뇌었다. 제발 현충일 동창회모임에서 제갈민주가 소식을 잘못 전해서 미안하다고 사과하길 기도했다.


동창회에 반가운 얼굴들이 많이 모였다. 다들 새로운 중학생활을 이야기하느라 야단법석이면서도 문승협을 의식하는 친구들이 여럿이었다. 특히 가깝게 지냈었던 친구들이 그랬다. 김용남과 가병수가 필요 이상으로 말을 걸었고, 현기정과 박진숙은 자꾸 음식을 챙겨 권하였다. 차여선과 이정주가 나란히 앉아 이야기를 나누면서 문승협을 힐끗힐끗 쳐다보고, 김철종과 제갈민주는 문승협의 심기를 살폈다.

문승협은 화장실을 다녀오다 이정주와 차여선의 숙덕이는 소리를 들었으나 못 들은 척했다. 이정주네 사진관에 와서 문승협이 최선경사진을 한참 바라보다 가길 여러 번이었다고 소곤거리며 걱정하였다.

김용남이 주도하여 동창회임원을 정했다. 이전 학생회임원들이 맡기로 하였다. 하나 둘 자리를 뜨고 동창회가 끝날 무렵, 제갈민주가 문승협에게 잠시 밖에서 이야기하자고 했다. 제갈민주가 말해준 최선경소식은 이전과 다르지 않았다. 낙담해 있는 문승협에게 놀라지 마라며 더 충격적인 소식을 전해줬다.

최선경건강이 많이 안 좋은 상황이고, 지금은 병원에 입원 중이라고 하였다. 아직 결정되진 않았지만 치료를 위해 미국으로 이민 갈 수도 있다고 했다.

문승협이 다급한 심정에 최선경연락처를 물었으나, 제갈민주는 모른다고 하였다. 문승협이 재차 사정사정하며 몇 번 묻자, 제갈민주가 모른다는 대답을 반복하다 울음을 터트렸다. 만약 최선경이 우리나라를 떠나게 된다면 꼭 연락할 거라는 암시만 주고 그대로 가버렸다.

문승협은 혼란스러웠다. 이렇게 주체하기 힘든 감정은 도대체 무엇인지, 이렇게 사람이 그리울 수 있는지, 최선경은 또 어떤 감정이길래 이러는지, 도무지 알 수 있는 것이 없었다. 한가닥 희망이 절망으로 변했다.


그러한 절체절명순간도 세월이 흐르면 적응하는 것이 인간이었다. 절박하던 2주의 시간이 지났다.

문승협은 당장 눈앞에 닥친 일상에 순응하느라, 감정이 무뎌져가는 자신을 발견하였다. 인간이 적응의 동물이 아니라면 인류가 멸망할 거라고 또 확신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인간은 참 이상한 생명체였다.

하지만 예고 없이 찾아오는 최선경생각이 문승협의 넋을 빼놓았다.

문승협이 보이스카우트 첫 대외봉사활동에서 실수하여 보이스카우트지도대장 민영보선생에게 꾸지람을 들었다. 보이스카우투단복을 입고 홍인중고와 덕일중고, 인혜여중고까지 6개 학교학생이 오가는 사거리에서 교통정리를 하던 중이었다. 1학년 문승협은 횡단보도에서 교통안전깃발을 들고 학생들을 안전하게 건너도록 유도하였다. 보이스카우트선배의 호루라기와 수신호에 맞춰 깃발을 움직여야 함에도, 지나가는 인혜여중생들 사이에 최선경을 닮은 아이를 발견하고 넋 놓고 쳐다보다 깃발을 제대로 들지 못했다. 더구나 제갈민주가 지나갈 때는 최선경을 물어보려고 자리를 이탈하였다. 다행히 2학년선배 남강이 신속히 후속조치를 하여 사고는 나지 않았으나, 하마터면 위험천만한 교통상황이 연출되었기에 민영보선생에게 혼났다.

봉사활동이 끝난 후 민영보선생이 따로 불러 요즘 무슨 일 있느냐고 물었다. 문승협은 아무 일 없다고 했지만 누가 봐도 정신 나간 사람같았다. 늘 한 교실에서 친하게 지내는 못난이5형제가 봐도 평소와 다른 문승협 행동이 이상해 보였다.

돌아온 일요일에 이어진 보이스카우트대외행사로 보육원봉사를 갔다. 오랜만에 만난 조동구형제가 문승협을 반갑게 맞아주었다. 복잡한 생각 없이 이불빨래와 청소를 함께하며 기분전환이 됐으나, 이진구와 강덕구가 점심시간에 놀러 오면서 다시 날카로워졌다. 이진구가 최선경에 대한 헛소문으로 문승협을 자극했다.

같은 덕일중에 다니는 이진구가 최선경을 완전 날라리라고 하였다. 인혜여중고매점에서 최선경이 문승협에게 사귀자고 고백했다며 거들먹거렸다. 문승협이 그런 적 없다고 부인하였음에도, 이진구가 계속 깐죽대며 최선경을 모함했다. 그렇고 그런 일로 퇴학당하려 하자 서울로 전학 갔다는 소문도 있다는 말에, 문승협이 더 이상 참지 못하고 이진구의 멱살을 잡았다. 조동구가 문승협을 말리며 이진구의 뒤통수를 때렸다.

“최선경이랑 젤로 친한 친구가 승협인디, 승협이가 아니라믄 아니제, 으째 자꾸 헛소리하냐.”

“승협아, 니가 참어야, 이 강덕구의 부탁이어.”

“승협아, 나는 니 말을 믿어. 그란께, 저런 쪼다 시끼 말은 한 귀로 듣고 흘려 부러.”

“야, 짱구. 너 한 번만 더 헛소리하면, 그땐 나한테 죽는다, 명심해.”

“뭐라고, 이런 개시끼가.”

“음마, 짱구 너 디질래? 승협아, 내가 알아듣게 야그 할 텐께 진정해야.”

문승협이 조동구중재를 듣고 이진구에게 경고하자, 이진구가 문승협에게 덤비려 했다. 조동구가 이진구에게 가만있으라고 윽박지르며 적극 막아섰다. 멀리서 이를 지켜보던 남강선배가 뛰어와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성, 암것도 아니어라. 옛날부터 둘이 좀 그랬는디, 인자 괜찬해라우.”

“문승협, 너 요즘 정신도 없고 으째 그냐?”

“죄송합니다 선배님.”

“저그서 대장님이 다 보고 있다잉, 봉사하러 와서 뭔 짓이어.”

건너편에서 담임선생이기도 한 민영보선생이 화난 표정으로 문승협을 노려보았다. 문승협은 복잡한 생각에 머리가 다시 찌근거렸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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