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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태양을 품은 별 Oct 02. 2024

단테의 별 - 1권 2부 9화

빛의 출현(出玄)-빛을 품다/존경도 사랑? - (1)

문승협이 다니게 된 덕일중학교는 사립학교법인 덕일학원소속이었다. 덕일고등학교와 인혜여중고까지 4개 학교가 같은 법인이며, 기독교재단이라 큰 교회도 있었다.

한 살을 더 먹고 한 학년이 올라 중학생이 되었지만, 중학교에서는 다시 가장 어린 후배였다.

중학교생활은 국민학교생활과 모든 것이 달랐다. 본인의사와 상관없이 일제강점기잔재인 빡빡 깎은 두발과 교복교모착용을 강요하였다. 교과내용이 심화되어 영어, 한문, 국사, 기술, 물상 등을 배워야 했다. 과목수가 늘어난 만큼 수업시간과 가방무게가 늘어났다. 많은 책을 넣고 무게를 견딜 수 있도록 가방 크기와 질뿐 아니라 모양마저 변하였다. 통학거리가 늘어나면서 통학 시간과 방법도 다양해졌다.

국민학교에 비해 중학교는 복장과 두발 등 학칙이 구체적이었다. 선배들이 전통이라는 명목으로 암암리에 정한 예의범절과 규칙까지 있었다. 강압적이고 불합리한 전통이라도 선배들 권위를 세워주려는 선생들의 암묵적 동조와 지지가 있어 가능하였다. 환경이 그런 만큼 항상 초조하게 생활해야 했다.

국민학교 때는 선배들이 위엄을 부려도 무섭거나 압도당하는 상황이 그리 많지 않았으나, 중학교는 선후배관계가 보다 밀접해 상하규율이 엄격하였다. 대부분 학교생활에서 선배들이 일거수일투족 간섭하고 군기를 잡았다. 상명하복분위기에 체벌도 빈번하고 억압과 통제를 받는 느낌이었다.

3학년선배들은 선생이 허용하는 범위에서 검은색 교복과 교모에 멋을 부려 착용했다. 신발도 교칙 내에서 편안하게 신었다. 반면 1학년신입생들은 목을 조여 답답하게 하는 교복상의호크를 반드시 채워야 하였다. 교모에 볼펜심을 넣어 멋이라도 내면 얼차려를 받았다. 신발뒤축을 접어 신는 3학년선배들을 따라 했다가는 건방지다고 얻어맞기 일쑤였다.

등교시간 복장검사는 교문을 통과하기 전에 미리점검해야 할 정도로 바짝 긴장해야 했다. 특히 두발검사 날에는 바리캉을 들고 규제하여 위협적이었다. 두발검사에서 걸리면 옆머리가 밀리는 것은 양반이며, 앞머리에서 정수리를 지나 뒷머리까지 고속도로처럼 밀리기도 하였다.


문승협의 중학생활 2주가 지나갈 무렵, 3학년과 2학년 선배들이 1학년 각반을 돌며 동아리활동을 설명하고 신입부원가입을 독려하였다. 국민학교선배인 2학년 남강이 문승협 반에 들어와 보이스카우트동아리를 설명했다. 문승협이 국민학교선배를 만난 반가움에 고개 숙여 인사하였다. 이를 본 3학년선배에게 ‘충성’ 구호와 함께 거수경례를 하라고 야단맞았다. 은근히 남강선배에게 편들어주길 기대하며 쳐다봤으나, 남강도 3학년선배의 말이라 모른척했다. 문승협이 기억하는 똑똑하고 강한 남강도 한 학년선배 앞에서는 힘쓰지 못하였다. 표정조차 굳어있던 남강이 문승협에게 다가가 보이스카우트입회신청서를 건네며 나지막이 물었다.

“올 거지?”

“네.”

“강요는 아니다잉.”

“네. 서울에서 국민학교 다닐 때도, 보이스카우트에 가입하려고 했었어요.”

남강이 3학년선배들 모르게 씩 웃으며 지나갔다. 문승협이 입회신청서를 쓰는데, 옆자리 황민이 쭈뼛거렸다.

“아야, 보이스카우트가 뭐대?”

“중학교는 소년대라고 하는데, 봉사활동도 하고, 캠핑도 가서 야외훈련도 해.”

“뭔 훈련아?”

“나침반 보는 거랑 독도법도 배우고, 매듭 법이나 자연활용법 같은, 야영생활에 필요한 기능 같은 거.”

“그런 거 배워서 뭐 한대?”

“뭘 하기 위해서 배운다기보단, 배워두면 쓸데 가 많지. 깊은 산속에서 조난당하더라도, 지도랑 나침반만 있으면 길을 찾아 나올 수 있어. 캠핑 가서도 유용하고, 배워서 나쁠 거 없어.”

“별게 다 있다잉.”

“단복도 있고, 여자는 걸스카우트라고 해.”

“여자도 있다고?”

“응, 스카우트진급과정과 기능과정도 있어.”

“아따, 서울 놈이라고 아는 것도 많다잉.”

문승협은 서울놈이라는 말이 듣기 싫어 사투리를 쓰려고 노력했으나 억양과 말투가 어설펐다. 특히 선생님 앞이나 발표할 때 긴장하면 서울말씨가 자연스레 나왔다. 그때마다 아이들이 정체를 물었다. 결국 사실대로 국민학교5학년 때 서울에서 전학 왔다고 말하면서 서울놈이라는 속칭이 계속 따라다녔다.

문승협은 황민 외에도 안광호와 이정훈, 송귀남과 친해졌다. 모두 키가 작아 앞자리에 앉았다. 뒷자리 키 큰아이들이 꼬마5총사라고 놀렸다. 그래도 국어선생 서수연은 못난이5형제라고 개칭해 부르며 예뻐하였다.


조지훈, 박두진과 함께 청록파 시인인 박목월이 사망한 날 국어수업시간에 추모시간을 가졌다. 서수연선생이 다음시간에 자작시를 발표하는 학생은 매점에 데려가 맛있는 걸 사주겠다고 약속했다. 남자중학생들에게 자작시라니 가당찮은 기대였다. 못난이5형제는 서수연선생체면을 생각해서 각자 준비하기로 하였다.

나흘뒤 돌아온 국어수업시간에 못난이5형제가 자작시를 발표했다. 역시나 못난이5형제 외에는 없었다. 서수연선생이 수업지도에 호응해 준 못난이5형제에게 점심시간에 교무실 앞으로 오라고 하였다.

덕일학원에 두 개의 매점이 있었다. 덕일중고가 사용하는 큰 매점이 있었고, 남녀를 차단하려는 목적으로 인혜여중고가 사용하는 매점을 따로 두었다. 덕일중고여자선생들은 덕일중고매점에 가면 남자고등학생들이 짓궂게 장난쳐서 인혜여중고매점을 주로 이용했다.

서수연선생이 못난이5형제를 인혜여중고매점으로 데려갔다. 점심시간에 까까머리 중학교1학년 남학생들이 매점에 들어서자, 여학생들이 귀엽다고 소리치며 시끌벅적하였다. 서수연선생이 환호하는 여중고생들을 향해 농쳤다. 남동생 삼고 싶거나 사귈 의향이 있는 사람은 별도로 쪽지를 달라면서, 오늘은 선보이러 왔으니 얌전히 다녀가게 해달라고 했다. 짓궂은 여고생들이 서수연선생의 애정 담긴 호소에도 불구하고 못난이5형제를 건드리거나 애교스럽게 볼을 꼬집었다. 문승협은 잔뜩 긴장하여 움츠러들었다. 여학생들을 피해 서수연선생옆에 바짝 붙어 따라갔다. 남자 많은 곳에 여자는 갈 수 있어도 여자 많은 곳에 남자는 못 간다는 말이 실감 났다. 서수연선생이 주문하는 사이, 수많은 여학생들 중에서 누군가 문승협을 불렀다. 문승협은 회피하려다 익숙한 목소리여서 고개를 돌려보았다. 여학생들 사이로 매점구석 창가 쪽에 제갈민주가 눈에 들어왔다. 여학생들의 시선을 받은 제갈민주가 용기 내서 일어나 손가락으로 자기 앞쪽을 가리켰다. 순간 여학생들이 바다가 갈라지듯 시선을 터줬다. 반가운 제갈민주 앞에는 뜻밖에도 최선경이 앉아있었다. 최선경이 문승협을 향해 소극적으로 손을 살짝 흔들었다. 문승협은 인혜여중에 같이 다닌다는 사실을 알았지만, 이렇게 인혜여중고매점에서 마주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최선경은 양갈래로 머리를 땋았고, 제갈민주는 단발머리였다. 둘 다 머리에 쓴 작은 교모가 잘 어울려 예뻐 보이면서도 교복 때문인지 성숙해 보였다. 문승협이 놀란 눈으로 손을 살짝 들어 올리자, 매점 안은 여학생들의 너스레로 다시 요란해지면서 바다가 닫히듯 시선을 가려버렸다. 문승협이 목을 쭉 빼고 떠들썩한 여학생들 사이로 바라보았다. 선배로 보이는 여학생이 최선경과 제갈민주에게 어떻게 아는 사이냐고 묻는 것 같았다. 당황하는 제갈민주모습을 끝으로 더 이상 볼 수 없었다.

서수연선생이 주문한 빵과 과자를 챙겨 들고 테이블을 잡았다. 빙긋 웃으며 문승협에게 물었다.

“여자친구야?”

“네, 국민학교요.”

“이름이 뭐야?”

“최선경, 제갈민주요.”

“학생, 거기 최선경, 제갈민주.”

“…….”

“거기 문승협 친구들.”

“선상님, 그 아그들 방금 갔어라우.”

“아야, 저그 이쁘장한 것이 문승협이란다야.”

서수연선생이 아쉬워하는 문승협을 위해 최선경과 제갈민주를 찾았으나, 둘은 선배들 등쌀에 교실로 가버렸다. 여학생들이 문승협의 이름을 알았다며 호들갑 떨었다. 문승협은 비록 갓 들어온 중학교1학년이지만 그날로 유명인이 되었다.

문승협은 그렇게 보고 싶었던 최선경을 만나 기뻤으나, 한마디 없이 가버린 최선경이 야속했다. 다시 왔으면 하는 바람과 미련으로 출입문 쪽을 계속 힐끔거렸다. 서수연선생이 시무룩해서 빵을 먹지 못하는 문승협을 토닥였다. 오늘 만났고 또 오늘만 날이 아니니 너무 아쉬워 마라며 빵을 건넸다. 문승협은 속마음을 들켜서 쑥스러워하며 빵을 먹었다. 서수연은 그런 문승협이 귀여웠다.

못난이5형제가 빵을  먹고 나가자, 여학생들이 다음에는 누나가 사줄 테니 언제든지 놀러 오라며 자기들끼리 키득거렸다.


문승협은 방과 후 집에 가까운 버스정류장에서 내렸다. 집 가는 길에 최선경집 앞을 지나가다 도저히 참을 수 없었다. 상점에 들어가 돈을 주고 제갈민주집에 전화했다.

“안녕하세요, 저 문승협입니다.”

“오메 승협이냐, 아따 오랜만이다잉.”

“네, 건강하시죠?”

“그라제, 가내 두루 다 평안하시고?”

“네, 덕분에요.”

“그래 으짠 일이냐?”

“저기 민주 있어요?”

“으짜까, 아직 안 왔는디.”

“네 알겠습니다, 전화 왔었다고 전해주세요. 안녕히 계세요.”

문승협은 통화되지 않아 실망스러우면서도 최선경이 더 보고 싶어 졌다. 최선경집에 직접 전화해 볼까 하다 그만뒀다. 일전에도 전화해 봤으나 신호만 갈 뿐이었다. 받더라도 최선경엄마가 집에 없다며 전화하지 마라고 당부하였다. 아무리 최선경건강을 걱정해서라지만 잘 이해되지 않았다. 어느 땐 최선경이 받은 느낌인데도 말없이 끓어버렸다. 왜 그러는지 도저히 짐작이 안되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갔다.


문승협은 새로운 중학교생활에 적응하려 힘썼다. 그러나 만남도 연락도 불가능한 최선경생각에 쉽지 않았다. 그렇다고 최선경만 붙들고 우울한 생활을 이어갈 수는 없었다. 마냥 무기력할 수 없어 돌파구 찾기에 나섰다. 고심 끝에 운동으로 합기도를 선택했다. 자신을 붙잡는 생각에서 벗어나려는 일상회복을 위한 몸부림이었다. 배우는데 몰입하려고 무척 애썼다. 합기도로 결정한 또 다른 이유도 있었다. 도안광산에서 태권도대련 때 윤두조에게 붙잡혀 위기에 처했던 기억 때문이었다.

식목일에 큰고모 문희숙이 서울에서 외국계은행에 다니는 이민현과 결혼하였다.

문희숙은 큰외삼촌 태선화학 박동후회장의 도움을 받아 목포지점에서 서울잠실지점은행으로 직장을 옮겼다. 서울잠실에다 신혼보금자리를 마련했으며, 이삿짐을 꾸리다 작은 고모 문희경과 소소한 언쟁이 있었다. 새살림을 꾸리는 입장에서 필요한 하나하나를 챙겼으나, 보내는 입장에서는 별것을 다 욕심 낸다는 시샘이었다. 구매주체와 주인이 애매한 물건에서 왈가왈부하였다. 문승협은 애지중지하던 엄마의 도자기그릇마저 챙겨가는 큰고모를 바라보면서 부디 행복하길 빌었다. 문희숙이 서울로 이사 가면서 문승협에게도 좋은 일이 하나 생겼다. 문희숙이 쓰던 방을 문희경이 차지하여 자연스럽게 문희경방을 물려받아 자기 방이 생겼다.


4월의 따스한 봄날씨에 보이스카우트신입생환영회를 겸하여 일로까지 자전거하이킹을 다녀왔다. 지친 몸과 마음을 이끌고 걸어가는데 집 앞에 김철종이 있었다.

“오메, 홍인중 김철종씨 아니오?”

“덕일중 문승협씨, 아따 오랜만이오잉.”

“그래, 잘 지냈냐?”

“잉, 나야 뭐 늘 그라제. 근디, 넌 안색이 별로다?”

“그래? 오늘 하이킹 다녀와서 좀 피곤해서 그런가?”

“내가 본께는 마음이 피곤한 거 같은디?”

“하하, 무슨 일이야. 집 앞에서 날 기다린다는 건, 뭔가 중요한 소식이 있다는 뜻인데?”

“소식은 소식인디, 소식이 쪼까 글타.”

“뭔데, 뭔데 그래?”

“선경이.”

“선경이가 왜?”

“다음 주 토요일 3시에, 학교 앞 그 분식집에서 만나자고 전해달라드라.”

“그래? 혹시 무슨 일인지 알아? 그동안 통 연락이 안 됐거든.”

“그날 가서 직접 듣는 것이 낫겄다, 자세한 것도 모른디 내가 말해봐야 그렇고.”

“뭔데, 아는 대로만 말해봐.”

“염병, 그냥 직접 들으란께. 전화로 할라다가, 오랜만에 얼굴 좀 볼라고 왔어야.”

“무슨 일이지? 그동안 전화도 안 받고 피하는 거 같던데.”

“얼굴 봤은께, 인자 갈란다. 선경이 만나고 혹시 무슨 일 있으믄, 우리 집으로 와라.”

“그래, 고맙다. 잘 가.”


문승협이 기다리는 일주일은 참 더디게 갔다. 일주일 내내 무슨 일인지 궁금해 안달하였다.

최선경은 땋은 머리를 풀고 하얀 블라우스와 청치마를 입은 운동화 차림이었다. 들어오는 문승협을 향해 환하게 웃어 보였으나, 문승협 눈에는 약간 억지스러워 보였다.

“잘 있었어?”

“응, 너는?”

“나도 잘 있었어, 그러니까 이렇게 만나지.”

“보고 싶었어.”

“…….”

문승협은 오랜만에 만나는 떨림과 반가움을 자제하며 보고 싶었던 마음을 전했다. 최선경은 주문한 음식이 나오는 순간을 핑계로 대답하지 않았다.

“자, 일단 먹자. 네가 좋아하는 라볶이 하고 만두야.”

“응, 너도 먹어.”

“많이 속상했지?”

“응, 마음대로 안되니까 원망도 하게 되더라.”

“미안해.”

“미안하다는 그런 말, 안 하기로 했잖아.”

“그래, 알았어.”

“앞으로도 계속 이래야 되는 거지?”

“응?”

“우리말이야, 앞으로도 맘대로 만날 수 없는 거야?”

“…….”

“근데 무슨 일이야? 무슨 일 있는 거지?”

“저 저기 말이야, 나, 나 서울로 전학가.”

“왜? 갑자기 왜?”

문승협은 그동안 못 본 것만으로도 서글펐는데, 전학 가면 마음에 이어 몸까지 멀어진다는 생각이 들자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이었다.

최선경마음도 다르지 않았다. 다만 자신이 무너지거나 약한 모습을 보이면, 문승협에게 미련을 갖게 할까 봐 냉정을 유지하려고 안간힘을 썼다. 서로 더욱 슬픔에 빠지는 것이 두려웠다.

최선경이 무거워진 분위기를 바꾸려고 목소리 톤을 높여보았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좋은 고등학교를 가야 좋은 대학 가잖아. 그래서 서울에 있는 좋은 고등학교로 가려는 거야. 설마, 내 앞길을 막진 않겠지?”

“내가 막을 수는 있고? 그럴 수만 있다면, 아니 그런 자격이 있다면, 기꺼이 보내줄게.”

“그 자격 내가 줄게, 기쁘게 보내주라.”

“그래, 네가 설사 가기 위해서 주는 자격이더라도, 그 자격 받을게.”

“그럼, 기쁘게 보내주는 거야?”

“응, 그럴게.”

“치, 너무 쉽게 보내주는 거 아냐? 나 진짜 서운해 질라 그래.”

“방법이 없잖아. 단지 방법이 없을 뿐인데, 이렇게 슬프고 억울할 수도 있네.”

“미안해.”

문승협은 자신 때문에 최선경을 슬프게 하고 싶지 않았다. 최선경눈에 고여있는 눈물에서 진심을 보았다. 무엇보다 최선경의 기대를 저버릴 수 없었다.

최선경도 문승협의 억울하다는 뜻을 누구보다도 잘 알기에 진심으로 미안하고 가슴이 미어졌다.

“언제가?”

“내일.”

“뭐라고?”

“미안해.”

“미안하다는 말 하지 말랬지.”

“그래도 미안해.”

“이건 진짜 너무한 거 아냐?”

“나도 슬프고 억울하다고, 네 말처럼 방법이 없었어. 그리고, 나 지금 가야 해.”

“…….”

“나도 할 말이 없을 정돈데 넌 어쩌겠니. 그래서 자꾸 미안하다고 하는 거야. 승협아, 미안해, 정말.”

“…….”

“너의 말이 다 맞아, 그런데, 틀린 말이 아니라서 더 슬프고 가슴 아파.”

“…….”

“편지도 하고, 전화도 할게.”

최선경은 어안이 벙벙해 석상처럼 굳어 버린 문승협을 두고 일어났다.

문승협은 이내 정신을 가다듬고 최선경을 뒤쫓아갔다. 한사코 싫다는 최선경을 집까지 바래다주겠다며 설득하고 부득부득 우겨서 끝내 나란히 걸었다.

둘은 함께 걸었지만 멍하니 아무 생각이 없었다. 최선경이 집 앞에 도착하자 문승협의 양손을 잡았다가 놓았다. 다시 양볼을 만져보고는 포옹하였다. 문승협이 끌어안으려고 손을 등으로 올리는 순간, 최선경이 떨어지며 애써 웃는 얼굴로 작별을 고했다.

“잘 있어, 내가 연락할게, 안녕.”

“…….”

최선경은 문승협의 작별인사도 채 듣지 않고 울음을 참으며 집으로 뛰어들어갔다.

문승협은 최선경의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만 봤다. 어느새 흘러내리는 눈물을 방치하며 눈앞에 없는 최선경을 향해 ‘잘 가’라고 작별을 고하였다.

최선경이 2층 자기 방으로 허겁지겁 올라가 침대에 엎드려 울었다.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커튼 뒤에 숨어서 문승협을 지켜보았다. 문승협은 그 자리에 그대로 주저앉아 울고 있었다.

둘은 각기 다른 장소에서 각기 다른 곳을 바라봤지만, 이별이라는 같은 감정으로 함께 울었다.

최선경엄마는 집에 들어오자마자 2층으로 뛰어올라가는 최선경을 뒤따라갔다. 침대에 엎드려 울다가 커튼 뒤에 숨어서 창밖을 보며 소리 죽여 우는 광경을 지켜봤다. 딸의 모습이 너무 가슴 아파 눈물을 흘렸다. 애처로운 마음에 다가가 안아주자 최선경이 넋을 놓고 울었다.

“엉엉엉, 엄마 어떡해, 나 어떡해. 엄마 어떡해, 승협이 어떡해, 엉엉엉.”

“선경아, 우리 아기야. 우리 잘 치료하고 나아서, 꼭 승협이 만나러 다시 오자.”

최선경엄마는 딸과 부둥켜안고 울면서, 길 모퉁이를 돌아 벽에 기대어 우는 문승협을 보았다. 문승협에게 미안함과 불쌍한 마음이 들면서도 딸을 생각해 주어 고맙고 예뻤다.

문승협은 한 번이라도 더 보고픈 마음에 최선경의 방창문을 지켜보며 울었다. 문득 울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면 최선경이 마음 아플 거라는 생각에 모퉁이를 돌아서서 울었다. 그렇게 한참을 울다 걸음을 옮겼다.

최선경엄마는 딸의 마음의 고향이자 딸의 사랑이 있는 곳을 떠나는 현실이 가슴 아팠다. 최선경말처럼 좋은 고등학교나 대학을 가기 위해 서울로 가면 차라리 좋으련만, 오로지 딸의 병치료를 위해 가는 전학이라 억장이 무너졌다.


문승협은 다음날아침 9시에 최선경집 앞으로 갔다. 몰래 배웅하면서 최선경얼굴을 한 번이라도 더 보려는 심산이었다. 그러나 아무런 인기척이 없어 가슴이 철렁하였다. 망설이다 용기 내서 초인종을 누르고 최선경이름도 불러보았지만 반응이 없었다. 어찌 된 여문인지 몰라 당황했다. 달리 방도가 없어 실망감만 안고 집으로 돌아왔다. 일요일이 시무룩하게 지나가버렸다.

이틀 뒤, 문승협은 편지를 받고 깜짝 놀랐다. 날짜를 보니 최선경이 서울로 가는 날 목포에서 붙인 편지였다.

엄마들이 긴 외출을 할 때 단속하는 것처럼, 슬퍼하지만 말고 공부 잘하라는 등의 내용이 대부분이었다. 서운한 마음으로 편지를 읽어가다 마지막 추신글에 눈이 번득 뜨였다.

‘P.S : 토요일 오후 3시에 전화할 테니 전화 옆에 꼭 붙어있어.’

문승협은 편지를 접다 멈칫하였다. 편지 군데군데 번져있는 글씨를 보았다. 눈물을 떨구며 편지 쓰는 최선경모습이 상상되었다. 심장이 아려와 편지를 가슴에 품고 그리움의 눈물을 흘렸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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